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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2 (수) 메뉴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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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칼럼/아리랑

아리랑은 겨레의 가락이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교민 4세(世)인 어린이들도 난생 처음 듣는 아리랑 가락에 어깨춤을 들먹였을 만큼 우리들 심신에 용해된 유전적 가락이다. 아리랑이 노랫말의 앞소리 또는 사잇소리나 후렴으로 드는 아리랑 가락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아리랑 가락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같은 전통민요 아리랑이 있고 경기아리랑 같은 신민요 아리랑이 있으며 또 아리랑맘보와 같은 가요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 가락은 많지만 하나로 모아지는 맥의 공통점이 있다. 한(恨)과 흥(興)이다. 그리고 그 한은 좌절감이며 흥은 성취욕이다. 이처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익살로 노래한 것이 아리랑 가락이다. 그래서 모든 아리랑 가락은 흥 속에 한이 있고 한 속에 흥이 있다. 언제나 애소(哀訴)와 진취(進取)의 정서를 같이 하면서 그것을 해학으로 간접 표현한 것이 모든 아리랑 가락의 특성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신민요 아리랑의 효시로 꼽히는 경기아리랑의 노랫말이다. 비록 님이 당장은 토라져서 떠나 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결국 돌아 올 것으로 보는 이유를 발 병으로 빗댄다. 이를 필연적 사실로 확신하는 데엔 충분한 정서적 공감의 이유가 있다. 모든 아리랑 가락에는 이같이 한과 흥이 어울린다. 그것은 겨레의 불행한 과거를 언제나 전화위복으로 새롭게 열어온 강인한 의지이기도 하다.

아리랑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는 알영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고 밀양의 전설적 낭자인 아랑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으나 설일 뿐이다. 다만 옛것을 돌아보아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고려시대가 배경인 것으로 미루어 아리랑 가락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 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건 아리랑 가락은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루 불려왔다는 사실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간의 모든 계층을 초월하여 구전·구승돼 온 것이 아리랑 가락이다. 이 때문에 아리랑 가락은 복합성과 다양성이 있다. 구전·구승돼온 가락에 그 때마다 민중의 새로운 정서가 실린 신사회적 변화의 강한 의지를 아리랑 가락에 담아온 것이다.

조선조말 대원군이 밀어붙인 경복궁 복원공사의 가렴주구에서 나온 ‘경복궁 아리랑타령’이 그러했으며,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이 간곤하게 항거한데서 나온 ‘독립군 아리랑’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가 있다. 아리랑이란 말이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그 어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마는 아리랑처럼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 단어가 없다. ‘아리랑’은 노래 가락의 노랫말 중 어조사(語助辭)에 불과하고 또 ‘아리랑 고개’는 어디를 가도 그러한 이름의 고개는 실제로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아리랑은 백마디의 말보다 우리의 공감대를 짙게 하는 응집력을 지닌 겨레의 소리다. 아리랑 고개는 그 어디에든 없어도 겨레의 가슴마다 살아 숨쉬는 우리의 맥이다. 조상대대로 이어 우리들 핏속에 꿈틀대며 흐르는 겨레의 가락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 이즈음의 세태가 이같은 심정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모두가 제 입장에서 제 좋을대로 안간힘을 다해 다툼을 일삼는 혼돈의 시대다. 말로써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차라리 말일랑은 침묵하고 모두가 ‘아리랑’을 불러보면 어떨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새로운 희망을 샘솟는 우리의 아리랑 가락을 다 함께 목청 높여 부르고 싶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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