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로고
2025.07.01 (화) 메뉴 메뉴
위로가기 버튼

호질문(虎叱文)

호랑(虎狼)이는 범을 무섭게 일컫는 말이다. 조상들은 호랑이를 경외시했다. 더러 호환을 당해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신령시하여 산군(山君)으로 여겼다. 어머니 병 구환을 위해 갈 길이 바쁜 효자를 호랑이가 등에 태워 바람처럼 달렸다는 등 호랑이와 얽힌 친근한 내용의 고담(古談)이 많다.

 

특히 한국호랑이는 날렵하고 털이 윤기가 나 고왔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우리의 산야에서 남획으로 멸종된 것은 1930년대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이 한국호랑이 털 가죽을 본국으로 보내는 최고의 선물로 쳐 마구잡이로 싹쓸이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도 식민지 지배를 당한 비운이다.

 

호질문(虎叱文)은 조선왕조 정조 때 실학의 대가이던 박지원(朴趾源)이 당시 서구 문물이 도입된 청나라 수도 북경을 비롯해 열하까지 다녀와서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린 글이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줄거리는 이렇다.

 

한 대호(大虎)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의원을 해치자니 몸에 독약을 지녔을지 모르는 의심이 들고, 무당을 잡아먹자니 불결한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다. 그래서 작심한 게 깨끗하다는 유생을 선택했는데 마침 어느 고을에서 도학으로 고명한 북곽선생이란 선비를 마주치게 됐다. 그런데 마주친 장면이 공교로웠다. 북곽선생은 동리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해 오다가 평소 의심을 품었던 과부의 아들이 몽둥이를 들고 방을 기습해 옷도 제대로 못 입고 허겁지겁 도망친 것이다. 한데, 도망길이 칠흑 같은 밤인지라, 발을 잘못 디뎌 그만 분뇨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북곽선생은 분뇨구덩이에서 한바탕 허우적거리다 겨우 머리만 내밀고 기어나오려는데, 이번엔 큰 호랑이가 떡 버티고 앉아 화경 같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질겁을 하여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며 머리를 정신없이 조아려 살려달라고 빌자 호랑이가 큰 소리로 꾸짖는다. “네 이놈, 말과 행실이 달라 더럽기가 네 놈 몸에 묻은 똥보다 더러워 네 고기는 먹기 싫다”면서 일장 연설로 신랄하게 나무랐다. 이윽고 호랑이의 꾸지람이 끝나 분뇨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들일 나가는 참이던 농부들만 자신을 둘러싸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이에 북곽선생은 “아,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는 의식을 했노라”고 이상해 보인 자신의 행동을 변명했다는 것이 호질문의 내용이다.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와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을 강조하면서 공리공론을 일삼은 당시 유생들의 부패상을 꼬집어 풍자한 게 호질문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끝대목으로, 말도 안되는 북곽선생의 변명이다. 그 유생이 호랑이에게 빈 것은 순간의 방편이었을 뿐, 호환의 위험에서 벗어나자 다시 위선과 교만을 떤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호랑이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어찌 북곽선생뿐이랴, 오늘날 정치 경제 심지어는 학계에 이르기까지 부패와 교만 속에 위선을 일삼는 현대판 북곽선생들이 쌔고 쌔게 널려 있다. 이들 또한 그 옛날의 북곽선생처럼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자기 합리화를 일삼는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북곽선생류의 거짓과 농간 때문이다.

 

특히 정치권의 부패는 더해 끝을 모른다. 호랑이는 배가 부를 땐 뭘 잡아먹을 생각을 않는다. 배가 고플 때만 사냥을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끝없는 탐욕을 부린다. 돈을 지녀 배가 터지도록 부르면서도, 부패와의 타협을 사양하지 않는다.

 

새해 2010년, 경인년은 호랑이띠 해다. 현대판 북곽선생들을 호되게 질책할 한국호랑이를 서울대공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 안타깝다. 박지원의 호질문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없지 않다. 한국호랑이는 한국적 정서를 함께하는 영원한 전설적 영물이다.  /임양은 주필

댓글(0)

댓글운영규칙

-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법률에 의해 제해될 수 있습니다. 공공기기에서는 사용 후 로그아웃 해주세요.

0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