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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뒤편

앞만 보는 직선의 삶 잠시 뒤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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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들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가끔 뒤로 걷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앞으로 걷는 사람들도 그들을 피하려다 보니 불편한 기색이다. 앞을 보고 걷는 것이 정상인 세상에서 뒤를 보고 걷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뒤’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불안, 죄의식, 퇴보 등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한 사정은 “뒤가 구리다.”, “뒤로 물러나다.”, “뒷골이 서늘하다” 등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관용어들만 봐도 쉽게 파악된다.

반면 ‘앞’이라는 공간은 대체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앞’과 ‘뒤’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 그 두 공간은 장소의 의미를 떠나 삶의 표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은유적 수사가 자칫하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앞은 긍정적이고 뒤는 부정적이라는 이원론적 단정이 그렇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달려라 하니’라는 애니메이션이 공영방송을 통해 방영되었다.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라는 주제곡의 가사는 희망적이었지만 당시의 현실은 암담했다. 앞만 보고 달리라는 희망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들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감추려는 군사정권의 술책은 ‘앞’은 용기와 희망이고 ‘뒤’는 퇴보와 불안이라는 은유적 수사를 활용한 것이다. “은유는 이성(理性)을 유혹한다.”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정의는 은유가 억압의 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은유는 독이며 약이다. 잘 쓰면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만 잘못 쓰면 치명적이다. 그러하기에 은유를 다루는 시인은 영혼의 의사라 할 수 있다.

 

천양희 시인의 <뒤편>은 끊임없이 질주하는 직선의 삶에 성찰의 쉼표를 찍어준다. 성당의 종소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듣는 이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종소리는 물리적인 파동이 아닌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울림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에서 온다. 그래서 우리가 듣는 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그 뒤편에는 박혀있는 ‘무수한 기도문’들의 간절함일 것이다. 백화점에 전시된 마네킹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화려함이 아니라 그 뒤편에 꽂혀 있는 ‘무수한 시침’이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의 뒤편에 스며있는 고통의 애잔한 흔적들, 그것이 삶의 근원이라는 것을 시인은 ‘뒤편’이라는 은유를 통해 전한다. 뒤편은 외면해야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품어야 할 진실의 공간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는 마지막 구절이 성당의 종소리처럼 귓가를 맴돈다. 시인 랭보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고 말한 것처럼 천양희 시인은 우리에게 “뒤편이 없는 삶이 어디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는 듯하다. 뒤가 없는 앞은 공허하고, 앞이 없는 뒤는 암울하다. 삶은 앞과 뒤가 어울려 만드는 노래이고, 곡선일 것이다. ‘뒤편’의 은유가 메마르고 지친 영혼을 따뜻이 어루만지는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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