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애•순애보가 낳은… 독립운동가의 비극적 가족사
신팔균, 무장투쟁노선 끝까지 고집... 일제 감시하에 베이징·남만주 왕래, 군사훈련 하던 중 치명상에 쓰러져
신팔균은 김경천(본명 김경서), 지청천(본명 지석규)과 ‘남만주 삼천(三天)’, ‘군인계 삼천’으로 불릴 만큼 독립전쟁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가 참여하거나 주도한 서로군정서나 대한통의부 등은 항일무장투쟁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단체였다. 베이징에서는 김동삼ㆍ박용만 등과 함께 창조파 일원으로서 무장투쟁노선을 끝까지 고집한 참된 독립군이었다.
1882년 5월19일에 신팔균은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자는 윤수, 호는 동천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본향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다. 그의 가문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무반이었다. 할아버지 신헌은 개혁적 관료로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이었다. 그는 어느 문인 학자에 못지않은 경세가로 글씨에 문장에 능통했다.
아버지 석희는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했다. 신팔균은 삼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 가균과 필균이 있었다. 가균은 그와 함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민영환의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에 해직됐다.
1900년 10월 무관학교에 입학한 신팔균은 1903년 9월 보병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인 1902년 7월6일 육군 참위(현 소위)에 임관됐다. 이듬해 3월 견습을 거쳐 군대해산 직전 보병 부위로 승진하고 보병 제7대대 부관으로 근위대에 배속됐다. 군대해산에도 그는 해임되지 않고 부위로 근무하는 가운데 2년 뒤에는 정위로 승진했다.
■교육계몽운동과 비밀결사운동에 뛰어들다
군인으로 재직하는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가 낙향하기 이전 동생인 필균은 친척인 신재균과 같이 사립보명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요 교과목은 한문ㆍ국어ㆍ역사ㆍ지리 등으로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에 열성적이었다. 교사는 신팔균을 비롯해 동생 가균ㆍ필균과 생질 이조영 등으로 사실상 ‘문중학교’ 성격을 지닌다. 그는 고택에 머물며 강당 고개에 있는 학교를 왕래, 학생들의 사기 진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신팔균은 이때를 전후해 대동청년당(단)원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를 중심으로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조직됐다. 목적은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데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종교인으로 훗날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장투쟁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다.
■“대동단결”…항일투쟁으로 그려나간 인생 방향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신팔균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회유했다. 사실상 국내에서 그의 활동은 불가능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임수명을 만나 결혼 전후인 1914년경에 중국 안둥(현 단둥시)을 거쳐 베이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베이징과 남만주를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3ㆍ1운동 이후 북경고려공산당에 가입ㆍ활동하면서 이후 최진 등과 군인구락부를 조직ㆍ활동했다. 1922년 8월에는 경신대참변 당시 발생한 한국인 고아들 교육을 위한 자치기관의 성격을 지닌 한교교육회를 만들었다. 목적은 교민의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있었다. 집의학교를 설립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1년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박용만ㆍ최동오 등과 북경한인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한인들의 교육ㆍ오락ㆍ구제사업 등 베이징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사회를 병행했다. 1924년 7월에는 원세훈과 신숙 등이 합세해 북경한교동지회로 개칭했다. 한중호조사에도 간여하는 등 베이징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에 헌신적이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김동삼 등과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임정개조론을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신정부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팔균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돼 5개 군구(軍區)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연해주와 만주 지역 무장부대를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활동과 함께 중국과 연대를 모색하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부각됐다.
■대한통의부 총사령관으로…강한 독립군 양성 ‘몰두’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도 무장단체 사이에 협력과 알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한통의부의 지휘부는 1924년 1월 중앙의회에서 위원장제로 개편했다.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그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군사훈련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관 자격을 갖춘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 학원’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7월2일엔 남만주 흥경현 이도구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지방군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동천은 진두지휘하면서 안전지대로 병력을 후퇴시키던 중에 총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다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총탄이 흉부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최후 순간에도 그는 “일제와 싸우다 죽어야 하는데,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크게 억울해했다.
■남편의 순국 소식을 듣고 생을 마감한 임수명
임수명은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대부분 여성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가족 관계나 성장 과정 등은 알 수가 없다.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던 중에 일제 경찰에 쫓겨 환자로 위장한 신팔균을 만나 1914년에 결혼했다.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베이징에서 1917년과 1919년 각각 아들을 출산해 양육했다. 남편은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한편 중국 동북지역 무장단체와도 긴밀하게 연락했다. 자녀 양육은 물론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도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신팔균이 순국하던 시점인 1924년 7월,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베이징에 있었다. 순국 소식을 알면 뒷일이 염려돼 동료들과 동지들은 그녀를 가족 곁으로 억지로 귀국시켰다. 귀국한 셋방살이로 전전하며 유복녀 신계영을 낳았다. 남편 소식을 기다리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순국 소식을 알았다. 이때 전후로 둘째 아들마저 병사하면서 충격을 받아 삶의 희망마저 잃었다. 결국 임수명은 갓난 딸과 함께 음독해 열녀처럼 남편의 뒤를 따랐다. 조카와 장남은 시신을 수습해 선영이 있는 진천에서 모셨다. 가정의 비극이자 슬픔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 장남이 사망하는 등 일제 강점으로 일가족 모두가 희생되고 말았다.
■진정한 독립군의 상징이 돼다
그녀의 죽음에 조의금을 전하는 등 잠깐이나마 사회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으나 곧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특히 <시대일보> 1924년 11월4일자 기사는 진한 여운과 메시지를 전한다. “(상략) 더구나 자기 남편은 그리운 조국을 벗어나 거친 만주 뜰에 비상한 죽엄을 하고 어린 자식을 둔 외로운 홀어미가 원한과 간난 중에서 이 세상을 살라 하나 자기의 몸을 의탁한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난 이상에는 좁쌀만한 몸을 의지할 곳이 없고 차라리 멀리 황천으로 따라가 외로운 혼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쾌하겠다는 것이 이런 종막을 짓게 된 것이다. 남편이 민족을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는 이 사실을 들을 때에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동정이 없지 못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들은 적지 않다. 안중근ㆍ이회영ㆍ이상룡ㆍ조소앙ㆍ오광선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망(國亡)에 즈음해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재산은 물론 존귀한 목숨까지 민족 제단에 바쳤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남편 사망 소식을 듣고 순국한 경우도 있었다. 신팔균ㆍ임수명 부부와 가족사는 우리들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다. 누구는 이를 두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는 너무 지고지순한 사랑과 조국애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 아닐까.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서울국립현충원, 독립기념관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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