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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0. 군자금 모금 위한 이수흥의거

수도권 일대서 무장투쟁… 청소년 항일의식 일깨운 기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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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그곳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신참변’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의거를 결행하다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해 자주적이고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의열투쟁, 외교활동, 실력양성운동, 무장투쟁 중 가장 핵심적인 방략은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전쟁임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목표로 조직됐다. 1920년대 압록강 건너 남만주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참의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단체였다.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단체는 경신참변 이후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수행하고자 통의부를 만들었다. 의도와 달리 이념적인 대립과 인선을 둘러싼 내부적 갈등은 곧바로 나타났다. 이에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참의부를 결성했다.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사이토 총독 저격과 고마령전투 등이 대표적이나 대부분은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수행됐다. 무장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주로 평안도 일대에서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군자금 모금을 위한 대표적인 사건은 황해도·서울·경기도 일대에서 전개된 이수흥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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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수흥

■ 일제의 독립전쟁 근거지 말살에 맞서다

이수흥(1905~1929)은 경기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일영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입학했다가 중도에 자퇴했다. 승려가 돼 속세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설득으로 하산한 후 중국 지린성으로 망명했다. 이때가 1923년 3월 말경이었다.

3·1운동을 전후로 독립에 대한 고조된 분위기와 맞물려 이곳에 많은 무장단체가 조직돼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수많은 애국청년들로 독립군을 편성하는 동시에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함으로써 독립전쟁은 가능할 수 있었다.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친일파 처단 등은 항일투쟁 의지를 고취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구 식민지화를 획책하는 일제는 무장단체의 근거지를 묵과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홍범도가 이끄는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의 참패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수립한 후 훈춘사건을 조작해 침략 구실을 만들었다.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으나 오히려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에 대한 보복은 너무나 잔인했다. 한인에 대한 대규모 살육·방화는 1921년 5월 말까지 자행됐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은 대표적인 경우다.

경신참변 후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던 독립군은 보민회·민회 등 친일단체를 몰아내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통합운동에 나섰다. 마침내 조직된 대한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주도할 군대로 의용군을 결성했다. 이는 가장 폭넓게 통합을 이룩한 독립군단이었다.

참의부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참의부 독립군의 설립 당시 편제는 통의부 의용군의 편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참의부 독립전쟁은 다른 무장단체처럼 유격전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적을 자랑하는 일본군과 전면전은 화력이나 전투력 등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한민족 독립전쟁사에서 ‘유격전’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교란하는 가운데 항일정신 고무와 독립의지를 계승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 단독으로 의거를 결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다

참의부의 유격전은 1925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다. 당시 대일 항쟁은 주로 국내진공작전으로 평안도 지역의 일제 관공서인 경찰서·우체국·영림서 등에 기습전이었다. 국내진공작전 중 국경 방면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였으나 병력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수흥의거는 침체된 무장투쟁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치밀하고 원대한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1926년 5월26일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은 펑톈을 출발했다. 그는 모젤 권총 1정과 실탄 147발, 브라우닝 구식 권총 1정과 실탄 29발 등을 휴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했다.

서울에 침투한 그는 일제의 검문을 피하며 7월10일 오후 11시경 동대문경찰서 동소문파출소 앞을 지나게 됐다. 때마침 보초 근무 중이던 토쿠나가 마사루(德永勝)에게 권총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자 즉시 모젤 권총으로 중상을 입히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일제는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나 이수흥은 유유히 경계망을 빠져나갔다.

이수흥은 유택수와 함께 안성군 읍내에 거주하는 부호 박승륙에게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신문기자라고 속인 후 마침 집에 있던 아들 박태병에게 군자금 제공을 요구했다.

이어 9월 28일에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계리에 사는 부호 이민응을 만났다. 군자금 요구에 이민응은 현금이 없어 당장 응하지 못하나 후일을 약속했다.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10월 20일에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 소재한 이민응의 식산회사를 찾아갔다.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근처 현방경찰관주재소를 습격했다. 곧바로 주재소에 들어가 근무 중이던 순사부장 모리마쓰 다게노(森松武之)를 향해 저격하였으나 불발이었다. 이때 함께 있던 고사카 후지타로(小坂富士太郞) 등 2인은 후문으로 도주했다. 이어 백사면사무소에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했다.

한편 이수흥으로부터 브라우닝 권총과 실탄 25발을 넘겨받은 유택수는 10월 25일 오후 9시경 독립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서울 수은동 소재 전익영이 운영하는 전당포에 들어갔다. 그의 형 전기영에게 군자금 5천원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불응하고 밖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저격했다. 이수흥은 7월부터 10월까지 경기 이천군 읍내면 중리 유택수·유남수의 집에 머물면서 군자금 모집과 경찰 등 응징에 힘썼다.

■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지를 북돋우다

무장투쟁사 가운데 이수흥의거는 더욱 빛을 발한다.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은밀히 국내에 침투하여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격살함으로써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의도였다. 고마령참변으로 전사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도 주요한 배경이었다. 비록 의거는 완전하게 성공하지 않았으나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과감하게 수행된 무장투쟁은 대단한 쾌거였다.

당황한 일제는 이 의거를 ‘제2의 김상옥사건’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순종 인산일을 전후로 국내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상황에서 전개된 의열투쟁은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였다. 공판일에 인산인해를 이룬 방청객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이수흥은 상고를 포기했다.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니 25세의 패기만만한 청춘이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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