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수인 ‘갑’은 ‘병’소유의 이 건 토지를 매수하였다. 매매계약은 소유자와 직접 체결한 것이 아니라, 대리인 ‘을’이 소유자를 대리하여 체결하였다.
대리인 ‘을’은 소유자라는 ‘병’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또 땅문서까지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병’이 틀림없이 땅 소유자라고 믿고 대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리인 ‘을’에게 대리하도록 한 사람은 진짜소유자가 아니라 가짜소유자이었다.
가짜소유자는 주민등록증과 등기권리문서 등 문서를 위조하여 ‘진짜 소유자’와 같은 모양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을’은 ‘가짜소유자’를 ‘진짜소유자’로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믿은 것에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대리인 ‘을’이 ‘가짜소유자’를 ‘진짜소유자’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짜소유자’를 대리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도, ‘을’은 매수인 ‘갑’에게 법률상 책임을 져야 하는가.
민법에서는 대리인이 대리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리권이 있는 것과 같은 외관이 있는 경우(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와 인감도장을 가지고 있는 등)에, 그러한 외관의 발생에 본인이 어느 정도의 원인을 주고 있는 경우(위 소유권이전등기서류와 인감도장을 함부로 준 것)에는, 그 무권대리행위(대리인 ‘을’의 행위)에 대하여 토지소유자인 ‘병’이 계약에 따른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표현대리)가 있다. 이렇게 법에서 표현대리제도를 둔 것은 일정한 외관을 신뢰한 선의·무과실의 제3자(‘갑’)를 보호함으로써, 거래의 안전을 보장하고, 나아가서는 대리제도의 신용을 유지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민법은 그러한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로서 3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즉, 대리권을 주었다는 뜻을 본인이 상대방에게 표시하였으나, 실제는 대리권을 주고 있지 않은 때(민법 제125조), 대리인이 권한 밖의 대리행위를 한 때(민법 제126조), 대리권이 소멸한 후에 대리행위를 한 때(민법 제129조)이다.
그런데 이 건 사안은 위 3가지의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 건은 대리인 ‘을’이 ‘진짜소유자’가 아닌 ‘가짜소유자’로부터 대리권을 받은 것이다. 이런 경우 계약을 체결한 매수인 ‘갑’은 ‘진짜소유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다만 대리인인 ‘을’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리인 ’을‘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짜소유자‘가 신분증 등을 위조하여 완벽하게 ’진짜소유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였기 때문에 꼼짝없이 속아서 정말 ’진짜소유자‘로 알고 대리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대리인 ’을‘이 아무런 잘못이 없이 대리행위를 한 경우에도 매수인인 ’갑‘은 대리인 ’을‘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민법 제135조 제1항과 판례는 대리인이 이렇게 아무런 잘못(과실)이 없이 무권대리행위를 한 경우에도 상대방에 대하여 상대방의 선택에 좇아 계약의 이행 또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신분증이나 인감증명서 등을 진본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위조하여 가짜소유자가 진짜소유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여 남의 땅을 속여 파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가짜소유자에게 속아 매매계약체결을 대리한 대리인은 이로 인하여 입은 피해자의 손해를 모두 배상해 주어야 한다. 타인의 법률행위를 대리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재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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