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으로 피난했다가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로 공을 세워 승지에 발탁됐다.
1601년 대사간이 됐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좌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후 판돈녕부사에 기용됐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 정묘호란 때는 서울을 지켰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일찍이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다. 성혼과 이이의 문인으로서 황신·이춘영·이정구·오윤겸·신흠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와도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 및 풍덕군수 장인정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이 있다. 시조로는 ‘오륜가’ 5장, ‘훈계자손가’ 9편이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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