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절터에 놀라고… 폐허속 寶庫에 놀라고
사적 제382호인 여주 고달사지에는 크게 4개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승탑, 보물 6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헤진탑비, 보물 7호로 지정된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8호로 지정된 고달사 석불대좌이다. 한번 이야기해보자. 우리 산하에 참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그 문화유산이 존재하는 역사적 터전을 사적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중 국14호와 보물6, 7, 8호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단순히 국보와 보물의 순위로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최소 10호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여주의 남한강가 혜목산 자락에 있는 고달사지는 예사로운 곳이 아닌 수준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화유산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천년을 맞이하면서 당연히 새롭게 조망해야 한다.
필자가 처음 고달사지를 찾아간 것은 1986년 10월초였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그때 학과 가을 정기답사로 고달사지를 가게 되었다. 혜목산에서 내려오는 시내물을 빨래터로 두고 있는 작은 마을과 함께 누렇게 익은 벼가 가득한 논 가운데 있던 석불대좌와 원종대사혜집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학 1학년의 어린 눈에도 이 석물들은 보통 석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린이들과 성인들 모두 고달사지의 문화유산을 처음 본다하더라도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고달사 혹은 고달선원(高達禪院)이라 이름붙인 절집이 자리하게 된 것일까? 지금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곳은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없다. 머지않아 드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아이언맨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니 혜목산 자락은 오히려 불편한 곳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곳은 남한강가에 위치하여 뱃길을 이용하여 남경인 한양과 수도인 개성으로 가기 원활한 지리적 위치에 있다. 그래서 고달사는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시대 전 기간에 이르기까지 번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달사는 고려시대에 지금의 도봉산 영국사인 도봉원과 문경의 봉암사인 희양원과 함께 3대 사찰로 이름을 떨쳤던 대찰이었다. 사(寺)라는 이름대신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단순히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공간만이 아닌 길을 떠난 모든 중생들의 휴식처로서의 기능까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강을 통해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기고자 하는 상인, 새로운 문물을 보고자 청운의 희망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청년,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불공드리러 찾아오는 백성 등 다양한 이들이 이곳 고달사 아니 고달원에서 잠을 청했던 것이다. 단순히 승려들의 수행만을 위한 것이 사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부처를 받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고달원은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길을 나선 모든 중생들의 삶의 안식을 위해 절집을 개방하고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운영된 절집이었으니 몇 백년간 고달사는 사람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고달사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라게 된다. 첫째 절터가 매우 넓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엄청난 가치 때문이다. 이 궁벽진 산골에 그것도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 앞서 이야기했던 국보 4호와 보물 6, 7, 8호의 문화유산이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 경기도에서는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해 1990년 후반에 마을을 이주시키고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0여년 이상의 발굴을 통해 고달사의 원래 규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로인하여 고려시대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새로 발굴된 고달사지를 입구부터 절터의 중심부로 오르다 보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물 8호로 지정된 석불대좌이다. 아마도 고달사의 주존불이 놓여져 있던 자리일 것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대좌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거대한 ‘통돌’을 찰떡 주무르듯 깍아 윗부분과 아랫 부분을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으로 다듬은 조각과 웅장한 모습은 고려인들의 웅혼했던 호기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부처가 곧 다시 부활하여 이 자리에 앉아 삼라만상의 온갖 진리를 토해놓을 것만 같다.
약간 위로 올라가면 보물 6호로 지정된 고려 광종대 원종국사 혜진탑비가 있다. 비신은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도괴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6년 여주시립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전까지 고달사지에는 귀부(거북이 받침 돌)와 이수이무기 형상의 머리돌)만 존재하다가 문화재청에서 비신을 똑같이 복제하여 귀부, 이수와 연결하여 원형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혜진탑비의 거북이 받침돌은 상상할 수 없이 힘찬 모습이다. 거북의 몸에 용의 얼굴, 당장이라도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모습은 고려왕실의 자주적 힘을 보는 듯하다. 이 탑비가 완성된 것은 광종 26년 서기 975년으로 당시 국왕이었던 광종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왕이었다.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자주국가를 건설하여 고려의 위용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탑비는 왕실에서 특별한 승려를 위해 제작하는 것, 결국 광종대의 고려의 자주국가의 꿈과 이상 그리고 힘이 이 거북의 모습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이곳을 지나 동쪽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고 기품있는 승탑(부도)이 모습을 드러낸다. 국보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이다. 승탑의 주인공을 알 수 없기에 다만 고달사지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른바 팔각원당형의 원형으로 걸작 중에 걸작이다. 신라말에 인간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불덕(佛德)이 높은 고승들의 다비식 이후 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는 불교계에서 새로운 혁명이었다. 인간의 지위가 곧 부처의 지위까지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거의 처음의 승탑이 바로 이곳 혜목산에 자리잡은 승탑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외롭지 않겠는가?
높이가 3.4m에 달하는 거대한 승탑은 단지 크다는 것에서 놀랄 뿐만 아니라 그 절묘한 솜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형태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여러 개의 돌로 짠 지대석에서부터 탑신과 옥개석까지 모두 8각형이다. 특히 가운데 돌의 거북머리와 네 마리 용의 웅장함과 그 과감한 표현 방식이다. 거북을 중심으로 용과 구름무늬를 둘렀는데 거북머리의 험상궂게 생긴 모양새와 모발이 사실적이다. 용머리도 험상궂은데 크게 벌린 입에 비해 눈은 작아 보인다. 여의주와 구름무늬의 현람함 또한 아름답다.
고달사지 부도가 있는 자리에서 평지로 내려오면 당시 고달사를 고려시대 삼대 사찰로 만든 장본인인 원종국사의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보물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서의 국보4호인 고달사지 승탑과 매우 비슷하지만 팔각원당형에서 변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승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용이 공손하게 위의 고달사지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제자의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승탑의 주인공인 원종국사는 죽기 전 열반송으로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이니 내 장차 떠남에 한마음으로 근본을 삼으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마음이 생기면 법(法)도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법도 없어지나니 어진 마음이 곧 부처라”를 남겨 놓았다. 지금도 이 열반송은 한국 불교사에 명 열반송으로 꼽히고 있다.
고달사는 웅장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곳으로, 경기의 불교문화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는 곳이다. 경기 천년의 역사속에서 경기 불교의 진정성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가치가 더욱 깊이 연구되어 진정한 고달사, 아니 고달선원의 모습을 더욱 밝혀지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과거 경기천년 역사가 빛난고 미래의 경기천년에 발전이 있는 것이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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