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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곤의 말글풍경] TV 오락프로그램의 ‘호칭 인플레’

예능 재주·기능 영역... 오락과 다른 표현
각종 잔망스러운 호칭 서열∙위계화 퇴행
존댓말·반말도 아닌 예사말 존재감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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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외래교수

방송사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큰 수익원이다. 광고나 협찬이 거의 집중된다. 차치하고 예능이란 이름이 맞나. 공자는 정명순행(正名順行)이라 했다. 실제에 부합하는 이름이라야 매사가 합리적으로 진행된다는 뜻.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걸맞다.

 

예능과 오락은 엄연히 다르다. 예능은 재주와 기능의 영역이며 음악·미술·연극·영화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분야를 제외한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오락 프로그램이다. 오락은 쉬는 시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일이란 의미다.

 

독일말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운터할퉁(Unterhaltung·오락)은 반드시 대화와 환담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공연이나 퍼포먼스 위주는 예능 프로그램, 토크와 재담 따위의 구성은 오락 프로그램으로 바루어야 제대로 된 이름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은 무엇이 문제인가.

 

언제부턴가 연예인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아무개가 아무개보다 형. 네가 그러니까 동생. 인제 보니 누나네.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언니였어요? 몰랐어요”라며 키득대는 모습을 본다. 몹시 잔망스럽고 보기 불편하다. “나이가 자기보다 곱절이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고, 열 살 이상 위면 형으로 대하며, 다섯 살 정도 차이면 웬만큼 공경하는 게 좋다.” 조선시대 학자 이율곡의 말이다.

 

적어도 열 살 차이는 나야 형∙동생 관계이니 요즘에 적용하면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은 물론 형이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친구뻘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현실과의 괴리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서너 살, 아니면 대여섯살 차이를 갖고 서열화∙위계화하는 모양새는 외려 퇴행적이다. 나이가 좀 위랍시고 상대에게 들입다 “야, 너” 반말을 하고 그 반대면 이내 ‘형님, 누나, 오빠, 언니’ 하는 모양새가 오히려 비례(非禮) 아닐까.

 

웬만한 나이 차이에서는 서로 높임법을 쓰고 적당한 거리를 두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예사말을 쓰던 이전 세대의 모습이 차라리 낫다. 3~4세 안팎은 서로 아무개씨 하는 적당히 낙낙하고 느슨한 관계가 바람직하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예사말의 존재감을 망각하는 부박함이 안타깝다.

 

지칭(指稱)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진행자∙출연자들이 나이∙지위가 위인 사람들을 언급하며 형님∙누님에서부터 대표님∙사장님∙선생님∙대선배님 운운하며 극존칭을 쏟아낼 때 시청자는 당혹스럽다. 또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신인급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함부로 하대(下待)하는 따위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방송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시청자가 중심이며 주인이다.

 

연예인 특유의 라포(Rapport·친근감)를 앞세워 얼토당토않은 극존칭을 쓴다거나 역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하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구현을 방송 프로그램이 가장 자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차제에 연예인 관련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오빠’를 다뤄보자. 오빠는 이제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친족어’로서의 기능보다 연인이나 젊은 부부 사이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더 친숙하다. 명절 때 ‘오빠’를 부르면 친오빠와 남편이 동시에 돌아본다는 아내들의 경험담이 익숙한 현실이다.

 

‘오파(opa)’는 놀랍게도 글로벌적(?)이다. 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에서는 ‘할아버지’의 애칭 혹은 노인을 뜻하고 스페인어로는 ‘바보·멍청이’, 또는 ‘안녕‘이라는 인사말로 쓰인다. 우즈베크어는 ‘누이·형’을 아우른다. 그리고 베트남어는 희한하게도 우리처럼 그대로 ‘오빠’의 의미다. 케이팝 팬들의 ‘오빠, 오빠’ 아우성은 그래서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오빠에는 그런데 음습한 면도 있다. “아저씨가 뭐야. 오빠라고 불러, 오빠 믿지?” 이런 경우는 젠더(gender)의 위계를 교묘히 악용하는 사례 아닌가. 그 사람 자신을 뜻하는 ‘자기(自己)·자기야’가 차라리 상대를 직접 부르지 않고 간접 소환하는, 괜찮은 완곡어법이라는 생각이다. ‘자기’를 과감히 재소환하고 ‘오빠’는 다시 친족에게만 쓰는 건 어떨지. 물론 케이팝 팬의 ‘오빠’는 그 자체로 단단한 성채이니 손댈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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