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로고
2025.07.02 (수) 메뉴 메뉴
위로가기 버튼

경제프리즘/바스티유와 홍위병의 교훈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면서도 몇 차례 베르사유(Versailles)궁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이리저리 궁전 내의 역사 미술관을 돌다 어느 전시(展示)방 입구에서 주춤 놀란 적이 있었다. 몇 번을 갔어도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온통 피를 뿌려 놓은 듯한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콩코드 광장(Concord Square)에 설치해 놓은 길로틴(guillotine)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장면을 비롯해 처형되려고 줄을 쭉 지어 서 있는 사람의 행렬과 잘린 목들에서 쏟아지는 피가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세느강(Seine river)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제일 소름끼쳤고 또 적나라했다.

그 방의 전시물이 전하는 시기가 언제의 것들이기에, 온통 핏빛으로 장식되다시피 한 것일까. 도대체 그 시기가 피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궁금하여 설명을 읽어보니 바로 루이 왕조가 붕괴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직전까지의 것이었다. 프랑스는 18세기 루이(Louis)14세 왕조 때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였으나 루이 16세 때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Bastille)감옥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으로 왕정을 포함한 구체제(Ancient Regime)가 무너지고, 민간 혁명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그러나 한달정도 지나 보여준 민간 혁명정부에 의한 교회재산의 몰수, 뒤이은 중과소득세의 징수, 곡물가의 동결, 정부 가격제 불이행에 대한 극형의 실시, 개인 신분증소지의 의무화, 이웃상호간의 감시(監視)제도 실시, 중상주의(mercantilism)에 의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지나친 지폐의 남발로 인한 재정혼란 등이 가중되었다.

이런 가운데 1792년에 제1차공공안전위원회(The First Committee of Public Safety)가 발족되자마자 반역자 처단명분으로 피의 학살이 파리 시가를 휩쓸게 되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약 200만 명을 죽인 피의 잔치는 나폴레옹의 독재정치 하에서 종식되기까지 약 25년간 지속되었는데 바로 그 시기의 미술품들을 전시한 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4년 여름 어느 국제학술회의의 만찬장에서 만난 한 중국인 교수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길 나누는 중에 문화혁명이 1960년경부터 1980년 등소평이 재등장할 때까지 약 20여 년 간 지속되었는데, 한창 피크에 달했을 때는 단 3명만 모여도 하나의 집단으로 인정을 받고 무슨 일의, 어떤 내용이든지 그 집단 맘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형태의 테러와 다름없는 폭력과 무자비의 소용돌이가 중국 전역 여기저기를 휩쓸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220여년전에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을 통해 왕정(王政)에서 공화정(共和政)으로 또 다른 민정(民政)으로 바뀌는 와중에서 무정부(anarchy)상태와 국가주의(statism)를 경험한 후 결국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독재(獨裁)로 옮아가는 약 25년간 흘린 그 엄청난 피범벅과 살육으로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과연 그 피의 대가가 뭐란 말인가. 결국 독재체제를 얻기 위해 그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십수 년 전 베르사유 궁의 미술 전시실을 나오면서 자문했던 질문이 20세기 중후반에 약20여년 간 홍위병을 동원한 문화혁명(文化革命)으로 인해 중국이 20년 이상을 후퇴했다며 한 중국인 교수가 치를 떨면서 이야기 할 때 또 한번 강하게 내 뇌리를 때렸다. 중국은 과연 문화혁명을 통해서 또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무슨 무슨 시민혁명(市民革命), 정치혁명(政治革命), 민족해방(民族解放) 등등 하는 정치적 구호를 접할 때면 지금도 나에겐 이런 반문(反問)이 강하게 일곤 한다.

/김 인 호 한양대 교수

댓글(0)

댓글운영규칙

-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법률에 의해 제해될 수 있습니다. 공공기기에서는 사용 후 로그아웃 해주세요.

0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