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뜬 외과의사 ‘나’(안성기). 어젯밤 몇명의 남녀와 낯선 별장에서 술을 마셨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번인데도 호출을 받고 병원에 나가 수술을 하고, 오후에는 이혼소송 때문에 법원에 가야한다. 차 안에서 소포로 받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선영(김민)의 소리다. 맹장수술을 받은 환자인 선영과 ‘나’는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선영은 ‘나’를 사랑했지만 ‘나’가 자신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떠났던 것이다. ‘나’는 선영을 찾아나서지만 선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실낱 같은 단서로 선영의 흔적을 더듬는다.’
4일 개봉되는 김국형 감독의 ‘구멍’은 ‘허수아비’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구멍’으로 제목을 바꾼 최인호의 소설이 원작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상영돼 호평을 받았으며 올해 인도영화제에서도 주목받았다.
김국형 감독은 서울예대 영화과를 나와 오랫동안 배창호 감독 등의 조감독을 했고 촬영을 담당한 석형징도 유영길 촬영감독의 오랜 조수 출신이라 ‘정통 충무로 출신들’이 만든 작품인 셈.
영화 ‘구멍’은 1999년 12월 어느 하루, 낯선 별장에서 아침을 맞은 ‘나’가 다음날 아침 한강에서 추락한 자동차 안에서 발견될 때까지 만 하루의 행적이다.
‘나’엔 영화배우 안성기가, 선영은 탤런트 ‘김민’이 열연했다.
낯설고 폭력적인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과 현대인들의 음울한 정서를 담은 ‘구멍’의 이미지는 다분히 탐미적이다. 영화의 주인공만큼이나 감독의 지독한 냉소가 흠씬 묻어난다. 또 ‘나’가 영화를 시종 주도하고 선영이 주요 배역인 정도로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캐릭터를 앞세우지 않고 이미지를 축적하는 데 주력한 것은 성공한 전략으로 보인다.
게다가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짜임새있게 구성하고 이를 화면으로 옮겨내는 솜씨는 얼치기 신인감독들과는 격이 다르다. ‘구멍’의 이미지나 내용이 그리 새롭지는 않지만 유행이나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정통적인 형식과 기법을 기둥삼아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감독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려 한 점이 눈에 띈다.
/박인숙기자 ispar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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