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지는 왜 무용지물이 됐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장안문은 방어에 가장 취약한 시설물이다. 따라서 좌우에 적대를, 위에는 문루를, 앞에는 옹성을 배치해 입체적으로 방어한다. 옹성 문짝도 철판을 입혀 화공에 대비했다. 철은 원래 불에 약하므로 철엽은 방화보다 내화 개념이다. 시간을 지체시켜 나무 문짝에 불이 붙기 전에 불을 끄느냐의 문제다. 당시에도 이 점을 알고 대안을 마련했다. 바로 오성지다. 옹성 문 위에 설치한 것으로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고 5개의 구멍을 뚫었다. 적이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되면 이 구멍으로 물을 흘려 넣는다”고 설명한다. 성역이 진행되던 시기에 정약용은 좌천돼 지방으로 가던 길에 화성을 지나게 된다. 이때 장안문 오성지를 보고 잘못을 지적한다. “오성지라는 것은 물을 퍼 내려서 적이 성문을 태우려 할 때 이를 막는 것이다. 그 구멍을 곧게 뚫어 바로 문짝 위에 닿게 해야 쓸모가 있다. 그런데 도면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었으니 이른바 그림책을 뒤져 천리마를 찾는 격이다고 한탄했다”이다. 한마디로 구멍을 옆면에 뚫었으니 물이 문짝에 직접 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때부터 오성지는 무용지물이 됐다. 왜 아래 면에 뚫지 않았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먼저 구조를 알아보자. 의궤에 “홍예의 개판 위에는 회3물을 깔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을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를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문 위에 나무 널빤지를 설치하고, 그 위에 회삼물과 벽돌을 깐 뒤 오성지를 놓아야 한다. 정약용 지적의 대상은 사실상 성역 총책임자 감동당상 조심태다. 필자가 조심태에 대해 변명을 하겠다. ■ 조심태를 위한 변명: 조심태는 구멍을 옆면에 뚫을 수밖에 없었다. 첫째, 조심태는 정약용의 설계대로 공사했다. 설계의 바탕인 중국 무비지 도면에는 오성지를 외벽 면을 일치시키고 물이 나오는 구명은 옆면에 뚫려 있다. 조심태도 무비지와 똑같은 모양으로 공사를 했다. 정약용도 “성 쌓는 사람이 도면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다”고 도면대로 한 점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말은 도면만 보고 그대로 하지 말고 목적에 맞게 조정해 가며 공사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둘째, 아래 면에 뚫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문짝 바로 위로 물이 쏟아지게 하려면 나무 널판 위에 오성지를 놓아야 한다. 이 경우 개판은 무게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문짝과 오성지 구멍을 일치시키려면 문짝을 2척 뒤로 물려야 한다. 이 경우 문짝의 최대 취약부인 회전축이 적에게 노출되고 옹성 두께도 늘려야 할 판이다. 조심태는 이런 점을 감안해 무게가 개판에 전달되지 않도록 홍예석 위에 오성지를 설치한 것이다. 셋째, 옆면으로 구멍을 뚫어도 오성지 기능에 아무 문제가 없다. 실정록에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되면 구멍으로 물을 흘려 넣게 된다”에서 “흘려 넣게 된다”의 원문 ‘하수(下水)’에 대한 해석이다. 문짝으로 직접 물이 떨어져도, 문짝 앞으로 떨어져도 모두 ‘하수’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불 끄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다른 근거도 있다. 정약용은 “수많은 적이 성문에 풀을 던져 언덕처럼 많이 쌓였을 때 불을 붙여 문을 태우면”이라고 발화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불화살보다 성문 앞에 인화물울 던져 놓고 불을 지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봤다는 의미다. 문짝 앞쪽으로 물이 흘러 떨어져도 풀에 붙은 불은 끌 수 있어 오성지 구멍을 꼭 문 바로 위에 오도록 할 필요는 없다. 정리하면 조심태는 중국 문헌과 정약용의 설계를 잘 지켰고 옹성과 문짝과의 위치를 고려하고, 구조 안전도 감안해 오성지를 설치했다. 당연히 기능에도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반대로 필자는 정약용에 대해서도 변명하겠다. ■ 정약용을 위한 변명: 정약용의 지적대로 아래 면에 구멍을 뚫는 것도 가능하다. 필자는 오성지를 홍예석과 개판, 두 곳에 반반씩 걸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60cm는 홍예석 위에, 60cm는 개판 위에 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설치하면 정약용이 원했던 대로 오성지 물이 문짝으로 직접 쏟아지고 개판도 무너지지 않는다. ■ 정약용과 조심태: 본래 오성지에 대한 고찰 두 사람을 비교한 것은 국내 유일의 화성 오성지가 정약용의 지적에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조심태의 오성지는 원래의 제도에 맞게 정상적으로 설치됐음을 밝혔다. 조심태의 설계와 시공이 정약용의 지적보다 근본적으로 오성지의 목적에 부합한다. 조심태의 오성지는 흐르는 양이 균등하기 때문이다. 물은 한곳에 가두면 윗면은 평형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수평이다. 옆면에 뚫린 구멍 아래까지 물을 채워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위에 아무 곳에나 물을 부어도 5개 구멍에선 균등한 양의 물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아래로 뚫린 정약용의 오성지는 어떻게 물을 부어도 5개 구멍으로 물이 균등하게 쏟아져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넘쳐 흐르는’ 상태와 ‘쏟아져 내리는’ 상태의 차이다. 지금까지 오성지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정약용의 지적’ 때문이 아니다. ‘정약용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했던 우리 때문이다. 정약용의 지적에서 허구를 살펴봤다. 오늘은 오성지를 되살려 낸 날이고 조심태와 정조가 누명을 벗은 날이다. 오히려 1970년대에 물통도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복원한 지금의 우리가 죄인이다. 글·사진=이강웅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미재단 4-H 훈련농장 보존' 위한 소새마을 향토역사 심포지엄 1일 성료

전후 한국 재건의 산실이었던 한미재단 4-H 훈련농장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모였다. 소새마을 향토역사 심포지엄 ‘한미재단 4-H 훈련농장 보존 의의와 발전방안’이 1일 오후 4시 부천 소사공간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양정숙 부천시의회 의회운영위원장, 신승직 소새마을기획단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안운설 소사본동 책임동장 등을 비롯한 50여명이 참석했다. 심포지엄은 6·25 직후 1952년 한국의 재건 도모를 위해 미국에서 설립한 비영리 원조기관인 한미재단의 역사적 흔적을 보존하자는 목소리를 한데 모으기 위해 열렸다. 25년간 경제·농업·주택·보건 등 사회 전 분야에서 한미재단을 통한 발전이 이뤄진 만큼, 근대농축산업 발전사와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유산이 현재 놓여 있는 상황과 현실을 적극 알리자는 취지도 반영됐다. 현재 부천 소사대공원에는 1964년에 건축된 한미재단 4-H 훈련농장의 곡물저장고, 학습동, 기숙사로 추정되는 건물이 남아 있으나 현재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2021년 10월 한미재단 4-H 훈련농장 ‘사일로(사료저장용 축산시설)’ 건물만 경기도등록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가운데, 지정되지 않은 다른 축사 등 건물에 대해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지난해 12월 부천시의회 263회 정례회에서 최옥순 의원이 시정질의를 통해 소사대공원 내 한미재단 4-H 훈련농장 건물 보존 및 문화재등록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자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관련 주제발표를 위해 이창호 한미재단 4-H 동문회 사무총장(㈔더불어사는사람들 대표)과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이 대표가 4-H 훈련농장 훈련생의 실제 경험담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해당 유산이 내포하는 역사적 의미에 관해 객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대표는 1978년에 한미재단 4-H 훈련농장을 장기생 27기로 수료했던 당시를 떠올리면서 훈련농장의 축사 건물 앞에서 교육생들과 시간을 보냈던 기억, 실제 교육과정이 진행됐던 모습, 농기계 장비 등이 담긴 구체적인 사진 자료를 통해 당시 경험을 고스란히 객석과 나눴다. 이어 그는 과거 한미재단이 훈련 및 교육기관으로서 한국 재건에 기여했던 이력이 어떻게 미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이 대표는 “문화유산을 잘 활용해 부천시민들의 긍지를 높이는 방안이 정말 많다. 미래를 위한 고민들이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두 번째 발표에서 양 소장은 4-H 훈련농장 건물의 경기도등록문화재 등록 추진을 위해 밟아온 길, 지역사회에서 해당 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그간 쌓아온 전문적인 식견을 객석과 공유했다. 그는 원조 기관으로 시작한 한미재단의 역사를 세밀하게 짚어보면서 부천만의 역사가 아닌, 국가가 소중히 지켜내야 할 나라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부천향토문화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양 소장은 지난 2019년 양정숙 부천시의원에게 자료를 전달하는 등 한미재단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다. 그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보존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일부 건물만 남겨두고 철거되는 등 미숙한 대처로 이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사람이 우선이다. 법이 우선이 된다면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가 남아서 계승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발표가 끝난 뒤 열린 질의응답 세션에서도 참여 객석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방문객은 자신이 4-H 훈련농장에서 개를 관리했던 경험이 있다면서 오늘 자리가 뜻 깊었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부천시와 협의를 어떤 방향으로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나오기도 했다.  1969년에 전북 군산시 4-H 연합회장 자격으로 한미재단 교육을 수료한 김육진씨는 “이 대표의 발표에서 오랜만에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감회가 새롭다. 소중한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진심이 꼭 전국에 확산됐으면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신승직 이사장은 이날 행사에 대해 “이런 뜻 깊은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오늘 심포지엄을 여는 이유도 하나의 역사를 남기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한다. 사라져가는 소새마을의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102세 남궁전 사진작가

뜨겁게 내리쬐는 뙤약볕에도 아랑곳 않은 채 피사체를 물색하고, 수풀과 흙이 옷을 더럽힌다 해도 주저하지 않고 무릎을 굽혀 사진을 찍는다. 한참 어린 동생들보다도 언덕길을 빠르게 오르며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얼굴에서 한 뼘이 조금 넘게 떨어뜨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놀림은 거침없지만 정확하다. 혈기왕성한 어느 30대 젊은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로 102세가 된 남궁전 작가.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뻔하디 뻔한 격언을 다시금 곱씹게 했다.  남궁 작가는 5월 한 달간 의정부시청 현관에서 열렸던 제14회 노을빛 포토미디어 회원 단체 사진전 ‘노을의 함성’에 참여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다. 그는 김헌수, 임영택, 배용규, 박영희, 배정옥, 양병섭, 이윤우, 이진우, 이화려, 이효상, 한경희, 홍성기, 박영철 등 노을빛 포토미디어 소속 13명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겹겹이 쌓아온 시간의 흔적을 의정부 시민들과 나눴다. 남궁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주변 사람들과의 꾸준한 교류 활동이다. 2년 전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열었던 100세 기념 전시회 이후로도 2년 남짓 남궁 작가는 꾸준히 동료와 소통하고 카메라를 전국 방방곡곡에 들이댔다. 그는 여전히 한 달에 한 번가량 사진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출사 여행을 다닌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사진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면 그 사진들이 걸려 있는 장소를 가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따로 시간을 낸다. 지난달 31일 오후 용인 와우정사에서 남궁 작가를 만날 수 있던 이유 역시 오는 18일까지 열리는 ‘와우정사 및 불교사진 초대전’(주최 사진집단 행궁포토, 여성사진동아리 숲)에 참가한 일부 동료 작가들을 응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가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와우정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전에는 해외도 많이 나가고 산도 많이 올랐지만, 이제는 단순히 내가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해서 앞장서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기회가 닿는 데까지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면서 인생의 궤적을 남기고 싶어요.”  100세 넘은 노인은 여전히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지역 내 복지관과 교육기관 등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사진전에 참가하며, 의정부 내 각종행사, 노인정 사진 촬영 등의 봉사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또 사진 모임의 회원들과 함께 기획하는 전시 외에도 2021년 경기북부지역작가초대전 ‘순간의 시간들’ 초대작가 이력도 있다. 여전히 사진 작가로서의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곁에서 남궁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회원들도 “선생님은 의정부의 자랑”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쩌면 그의 사진에는 전문 사진 작가의 기교가 아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자체가 고스란히 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뷰파인더 너머 그의 눈에 담기는 세상은 어떤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채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되는 걸까.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철학을 가지고 담아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특별하게 따지는 게 없어요. 그저 몸이 가는 대로, 눈이 가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지요. 허허, 할 수 있는 데까지 또 몸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많은 풍경들을 이 사진기에 담고 싶네요.”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에 송문희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이사 취임

“어린이들이 입시경쟁에 내몰리기 전에 문화예술의 향기를 맡으며 인성과 창의성을 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에 송문희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이사(55)가 1일 선임됐다. 송 신임 관장은 이날 취임식을 한 뒤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한 송 신임 관장은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를 시작으로 (재)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이사(비상임), 한국협상학회 이사, 한국정치평론학회 이사, 통일연구원 연구원, 더공감여성정치연구소 연구소장 등으로 재직했다. 최근에는 전략문화연구센터(CSCS) 연구위원과 (사)한국공유정책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경기도여성가족재단 이사, 대통령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정치지역분과위원, 한양대 겸임교수, 대구카톨릭대 외래산학협력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 신임 관장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일에는 진보,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이 행복한 경기도, 어린이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가 많아지는 경기도를 지향하는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야 삶과 가까워질까…‘남은 인생 10년’ [영화리뷰]

불치병에 걸려 인생이 ‘10년’밖에 남지 않은 여자는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 속 대사처럼, ‘10년’이라는 기간은 마냥 짧지도 않지만 또 그렇다고 무작정 길지도 않아 마음을 어디에 두고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난치병으로 생을 마감한 고사카 루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남은 인생 10년’이 지난달 24일 개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예상가는 전개, 전형적인 장르 공식을 따라가는 멜로드라마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을 버텨내는 삶을 담는 방식에 관한 고민들을 꾹꾹 눌러 담았기에 주목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화가 시간을 어떻게 스크린에 옮겨놓았는지 살피는 일이 인물들의 삶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제공한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영화를 1년에 걸쳐 찍으면서, 시간 변화에 따라 배우들의 감정선을 매만졌다. 계절이 바뀌고,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에 다다른다. 촬영 환경에서 배우들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서 입김을 ‘호호’ 부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는 온도와 습도, 바람과 냄새에 의지해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내면의 감정에 귀 기울일 수 있다. 흩날리는 벚꽃잎, 불꽃 튀던 여름밤의 공기, 선선한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낙엽 등을 넓은 화면 속에 담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수려한 영상미 확보만을 위한 과정이 아니다. 죽기 위해 살고 있는 마츠리가 쓰러졌던 그 가을날의 어느 산책로에 어떤 공기가 맴돌고 있을지, 죽음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이어가는 카즈토가 뒤를 돌아본 그 벚꽃길에서 눈앞을 스치는 꽃잎은 어떤 향과 사연을 품고 있을지 관객들도 함께 느껴볼 기회를 만드는 셈이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5-③ 경쾌한 마리아치 리듬 타고 아르칸젤 교회로

쿠바에 아프로큐반 밴드가 있다면 멕시코에는 마리아치 밴드가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나라는 같은 라틴문화권이지만 멕시코에서는 흑인 음악 요소는 거의 볼 수 없고 오직 에스파냐계와 인디오계 두 요소만 혼합돼 있다. 무엇보다도 멕시코의 토착적인 요소가 강한 손을 이용한 현란한 연주 솜씨는 듣는 이로 하여금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푹 빠지게 하는 중독성이 있다. 마리아치가 연주하는 경쾌한 리듬을 타고 발걸음도 가볍게 동화 속 교회처럼 예쁜 첨탑을 가진 이색적인 형상의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로 향한다. 성당 입구에 많은 사람이 서성거려 무슨 일이 있는지 주변을 기웃거리자 교회에서는 한 쌍의 젊은이를 위한 혼배미사가 진행 중이다. 예식 마칠 때까지 먼저 외관을 살펴본다. 플라테레스크 양식의 독특한 외관을 가진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는 건축적 호몰로지와 분홍색 석재가 어울려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왜 이 교회를 멕시코 가톨릭교회 중 군계일학이라 하는지를 떠올리며 이곳저곳 둘러본다. 사료에 의하면 중앙에 있는 본당과 좌우 측면에 두 개의 예배당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 건설은 1542년 시작해 1649년 완공했다. 그 후 지진으로 부서진 교회는 1709년에 복원 공사를 마쳤지만 170년이 지난 1880년 플라테레스크 양식으로 전면부 파사드와 아트리움, 첨탑을 증축하기로 교구는 결정했다. 공사는 지역 출신 건축 장인 제페리노 구티에레스가 담당했다. 그는 유럽 건축가의 도움 없이 독일 쾰른 대성당 엽서에서 영감을 얻어 인근 사화산 채석장에서 가져온 분홍색 석재를 사용해 10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완성했다. 그는 당시 유럽 교회 건축 양식을 엽서 한 장만 보고 고딕 양식의 공간 개념을 변용하고 르네상스 양식의 요소를 결합해 마치 금과 은을 세공하듯 섬세하고 화려하게 외관을 완성한 천재 건축가다. 문득 몇 년 전 볼리비아에서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로 넘어갈 때 고산 호수에서 본 플라밍고가 떠오른다. 그때 본 분홍빛의 아름다운 색채감을 이 성당에서 다시 한번 느낀다. 구티에레스가 다양한 석재 중 분홍색 돌을 사용한 것은 예술가나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만큼 쭉 뻗은 다리를 가진 플라밍고를 디자인 개념에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박태수 수필가

"지역 숨은 일꾼 찾습니다", 우서문화재단 '우서문화상' 수상 후보자 공개 모집

우서문화재단이 ‘제8회 우서문화상’ 수상 후보자를 1일부터 공개 모집한다. 우서문화재단은 대한제국 말부터 평생 농촌진흥운동에 헌신한 우서 오성선(1872~1950) 선생을 기리고자 2016년 설립됐다. 우서 선생의 개혁정신을 계승하고자 출범과 동시에 우서문화상을 제정, 매년 부문별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우서문화상은 사회봉사상, 농업인상, 청년 농업인상, 유공 공무원 특별상 등 총 네 개 부문이다. 사회봉사상, 농업인상, 청년 농업인상 부문별 수상자에게는 상금 1천만 원과 상패를 수여하며 유공 공무원 특별상 수상자는 격려금 100만원을 전달한다.  사회봉사상은 ▲사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한 개인 또는 단체 ▲사회 안정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개인 또는 단체 ▲주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문화·체육의 혜택을 누리도록 실행한 예술·체육인 또는 단체가 대상이다. 경기도 내 거주하는 개인이나 사무소를 둔 법인이나 단체여야 한다.  농업인상은 ▲새로운 농업기술의 개발 및 보급을 통해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는 등 농업 발전에 기여한 농업인 ▲농업인들의 소득 증대 등을 통해 지역 농업 발전을 이끌어 가는 선도 농업인 ▲새로운 품목 개척 또는 농산품의 품질 향상과 부가가치를 창출해 수출 등 농업 발전에 공헌한 농업인 등이면 추천 가능하다. 실적 기간은 공고일에서 과거 5년 간이다. 청년농업인상은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선도하는 청년농업인(1982년 1월1일 이후 출생자)으로 위 농업인상에 해당하는 업적을 실현한 경우 해당된다. 농업인과 청년농업인 수상 대상자는 도내 주소와 사업장을 두고 영농활동을 해야 한다.  올해 새로 신설된 ▲유공 공무원 특별상은 농업인상, 청년농업인상 수상자에 선정된 농업인을 책임 지도·육성한 시군 농업기술센터 등 관련 기관의 유공 공무원이 대상이다.  사회봉사상은 도내 관할 읍·면·동장이나, 재단의 수상 후보자 추천 요청을 받은 관련 기관·단체장, 20인 이상의 도내 거주자나 우서문화상의 역대 수상자(동일 시상 부문) 등에게 추천 받으면 된다. 농업인상과 청년농업인상은 관할 시·군 농업기술센터장이 추천할 수 있다. 후보자 접수는 7월 31일까지며, 분야별 심사위원회의 심사와 재단 이사회 결의를 거쳐 최종 수상자를 결정한다. 시상식은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우서문화재단 관계자는 “지역사회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분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포상·지원해 향토 문화 발전을 선도하고 살기 좋은 선진사회를 구축하는 데 노력하겠다”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신청 방법 및 자세한 내용은 우서문화재단 사무국을 통해 문의하면 된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시인과 농부

한때 불의의 외도로 피폐했던 시절, 시달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이곳에 오간 적이 있다. 나의 고해를 엿들은 주인장이 배웅하며 대추차 한 팩을 건네준 기억이 새롭다. 켜켜이 쌓인 방명록, 저마다의 사연이 포스트잇에 빼곡 매달렸다. 가끔 시 낭송회와 그림 전시도 하지만 입구에 “어서 오세요, 벗어 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가 의미를 정당화하는 데 위배되지 않는 쉼터다. 휴일에 어반스케치 팀과 함께 왔다. 주인장은 여전히 청색 원피스에 중절모를 썼다. 요요마의 첼로 엘가가 도입부부터 현을 떨며 LP판을 타고 흐른다. 세르지오 토피의 펜화 재킷에 담긴 Toppi’s Ladies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재즈의 우아한 우수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의 끈적한 분위기를 소환한다. 질그릇에 삶은 감자를 담고 잔 얼음에 뽀얀 식혜도 놓였다. 정물을 그리며 모두 감자를 먹는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스친다. 도기 찻잔에 가득 담긴 수제 대추차도 그윽하다. 음식을 매개로 한 담소는 무엇보다 생기가 있다. 삶의 구성이 의식주라면 누군가와 함께 차 한 잔을 나눈다는 것은 가장 구체적인 인생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수십억이 살아가는 이 세상, 그중에 당신 앞의 단 한 사람. 지금이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다.

'예술인 기회소득' 6월 지급 불발…경기민예총, 규탄 성명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예술인 기회소득’의 내달 지급이 불발된 가운데, (사)경기민예총 소속 예술인들이 조례안 상정에 반대한 경기도의회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경기민예총은 29일 ‘경기도 예술인 기회소득 지급 조례안’ 상정 및 의결을 강력 촉구하는 성명서를 통해 “경기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이 조례안의 상임위 상정을 전원 반대하면서 예술인들의 오랜 숙원이 가로 막혔다”면서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된 의원들의 개별 의견을 봤을 때는 예술인의 어려움에 공감했고, 조례안의 필요성과 의미도 알고 있던 상황”이라고 규탄했다. 조례안은 경기도에 거주하는 예술활동 증명 유효자 중 개인소득이 중위소득 120% 이하라면 연 150만원을 지급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례안이 상정되면 오는 6월부터 예술인 기회소득 대상자 선정 절차를 밟아 지급이 시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4월21일 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임시회 1차 회의에서 국민의힘 소속 도의원들이 전원 불출석해 안건이 상정되지 않은 데 이어 같은 달 24일 임시회 2차 회의에서 조례안 상정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이어 열린 27일 2차 본회의에서도 조례안은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김성수 경기민예총 사무처장은 “가장 큰 쟁점은 사회보장제도 신설 협의안이었는데, 3월 도가 복지부와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도 반대하는 것은 그저 발목잡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오는 3분기 내지는 4분기 일괄 지급을 위해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면담을 경기예총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명확한 약속이 없다면, 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대응 행동에 대한 수위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족돌봄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다…'나는 돌봄하고 있습니다' 북토크

지난 25일 오후 7시30분 영업을 마친 수원특례시 영통구 망포동의 서른책방에선 조금 특별한 독서 모임이 진행됐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기지역본부가 펴낸 ‘나는 돌봄하고 있습니다’를 읽고 느낌을 풀어낸 서평단, 그리고 실제 자신의 경험을 책에 담은 가족돌봄청년과 관계자 등 13명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책 속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청년 봄, 진수, 동그라미, 샐쿵, 곰돌이, 라일라, 스간 등 7명(전원 가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자립준비청년을 거쳐 가족돌봄청년이 된 이들, 위탁가정에서 돌봄을 받다가 어느샌가 가장이자 돌봄의 주체가 된 이들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든 책이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인터뷰를 거쳐 12월 출간된 뒤 세상과 만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책의 존재를 모르고 가족돌봄청년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빠와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 고등학생 봄씨는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 아까워 정신을 붙잡고 삶을 꾸려나갔다. 샐쿵씨도 어느 순간 집안의 가장이 됐고, 스간과 라일라씨도 자신들을 키워준 할머니의 보호자가 됐다. 동그라미씨는 보육원을 퇴소한 뒤 만난 어머니의 투병을 돕고, 곰돌이씨는 아버지가 가출한 뒤 할머니를 위해 동생과 함께 돌봄의 무게를 나눠 짊어진 삶을 묵묵히 버텨왔다. 스무 살 진수씨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를 돌보느라 간병 경력만 10년이 넘는다. 누군가의 자녀인 진수씨는 동시에 누군가의 보호자가 됐다.  모임 참여자들은 이날 ‘가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나눴고, 평소 ‘돌봄’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도 함께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각자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을 발취해서 읽어보고 나누고 싶은 구절을 공유했다. 이날 모임에 참여한 7명의 서평단 중 한지언씨는 “126페이지에 있는 내용이 너무 가슴 아팠다. 정말 샐쿵씨의 표현처럼 이 친구들이 돌봄의 대상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본인만 챙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책임을 짊어진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게 무엇이 있는지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도와준다면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을 조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책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인터뷰를 통해 가족돌봄청소년을 만났던 구준선 사회복지사는 책을 줄글로 풀어 쓰지 않고 대화가 그대로 담긴 인터뷰집으로 출간한 이유에 대해 “자꾸만 손을 거치고 가공하면 이 친구들의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가감없이 목소리를 전달하자는 차원에서 인터뷰 형식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이 책을 통해 솔직한 내면을 공개한 가족돌봄청년 진수씨는 “엄마가 얼마나 외로우셨고 의지할 곳이 없었을까 이해는 충분히 하지만 엄마도 엄마의 삶을 계획해보는 것에 대해 서로 생각을 나눠봤으면 한다”면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가족돌봄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용기를 내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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