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5-② 동화속 한 장면 안토니오 교회

구시가지 입구, 라팔마와 산안토니오 교차로에 내리자 동화 속 요정이 사는 마을 교회처럼 외관 색상이 새하얀 성 안토니오 교회를 먼저 만난다. 교회는 아기자기한 외관처럼 내부도 정갈하고 중앙 제단의 정교한 십자가와 성상(聖像)이 인상적이라 여행지에서 만난 영적 장소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교회 주보성인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제가 돼 이탈리아 파우다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불멸의 사랑과 헌신으로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돌봤고 신학적 지식을 쌓아 설교함으로써 수도자와 신자를 매료시켰다. 안토니오는 안타깝게 36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나 그는 사망한 지 채 1년도 안 돼 시성(諡聖)됨으로써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빨리 성인 품위에 올랐다. 성 안토니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포르투갈 리스본에 맨 먼저 교회가 세워졌고 지하묘소에는 성인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가톨릭교회는 안토니오의 사랑과 헌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도 그중 한 곳이다. 당대 성인과 수도자를 가장 잘 그린 스페인 최고의 정물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은 성경 앞에 무릎 꿇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는 ‘성 안토니오 정물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안토니오 사제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명작으로 생전에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수르바란을 적극 후원했다. 성 안토니오 교회를 나와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로 가기 위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는 역사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인 중세 건물이 길 양편에 줄지어 있어 마치 스페인 어느 시골 마을에 시간여행을 온 듯 착각에 빠진다. 엘 하르딘 공원이 가까워지자 마리아치 리듬이 오전임에도 귓전을 때린다. 대성당 앞 노천카페에서는 아름다운 멕시코 자연과 사랑의 연가 시엘리토 린도를 연주하더니 연이어 멕시코 독립혁명 당시 농민 혁명군이 즐겨 불렀던 경쾌한 리듬의 민요 라쿠카라차를 열창한다. 산 미겔 데 아옌데는 멕시코 독립투쟁 당시 독립 영웅 이달고 신부와 함께했던 아이그나시오 아옌데 장군의 도시라 이 노래가 애창되는 듯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5-① 그림 같은 산 미겔 데 아옌데 '아르칸젤 교회'

어제 둘러본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지만, 오늘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아 동화 속 중세마을 산 미겔 데 아옌데로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에서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를 탄다. 차에 오르려 하자, 승무원이 승객에게 초콜릿 샌드와 소프트 쿠키에 곁들여 물 한 병을 나눠준다. 버스가 과나후아토 시가지를 벗어나자, 산등성이 들판에는 멕시코의 상징인 기둥 선인장 ‘칵투스’가 이방인을 반긴다. 서부영화에서 본 광활한 멕시코 풍광이 눈앞에 펼친다. 이색적이고 목가적인 자연경관은 끝없이 이어지고, 시골길 같은 한적한 산길을 1시간 반 정도 달려 터미널에 도착한다. 산 미겔 데 아옌데는 기후가 서늘한 고지에 1542년 건설됐고, 에스파냐 문화와 메소아메리카 인디오 문화가 조화를 이룬 도시이다. 구시가지에는 바둑판처럼 생긴 자갈길에 콜로니얼시대 상흔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안뜰 정원이 있는 중세 건물은 당시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한 폭의 그림 같은 교회와 잘 가꿔진 공원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공예가와 장인의 공방을 보노라면 창작품이 여행객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빛으로 빚어낸 화려한 색채의 변화를 감상하노라면 그들의 영감과 혼을 느낀다. 구시가지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주요 관광 명소는 대부분 역사 지구에 있다. 수 세기에 걸쳐 지은 바로크· 네오클래식· 네오고딕 양식이 융합된 건축물이 즐비한 이곳은 중세 콜로니얼시대로 여행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가가 저렴하여 미국이나 캐나다 은퇴자가 롱 스테이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 레스토랑이나 공원에서 쉽게 그들을 만난다. 산 미겔 데 아옌데의 상징은 엘 하르딘 공원 앞에 있는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다. 터미널에 도착해 택시 타고 구시가지로 가려 했으나 가격 흥정이 되지 않아 낡은 시내버스를 탄다. 배낭여행을 할 때 가끔 택시 요금이 부담되거나 현지인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으로 버스를 타는 것도 좋다. 물론 택시보다 다소 시간은 더 걸리지만, 현지인들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나 버스 안은 붐비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초반 시내버스처럼 덜컹거리고, 어딘가 부딪쳐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은 왠지 낯설지 않으며, 오히려 추억의 소리처럼 정겹게 들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⑦ 여행에서 얻는 성숙한 지혜

몇 년 전, 남미 여섯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과거 식민 통치를 당한 아픈 역사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새로운 희망과 번영을 찾으려는 모습을 봤다. 고전 명작을 읽을 땐 지금의 나에게서 벗어나 타자 관점에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그들의 삶에 빠져들어 간접 체험을 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적 호기심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고전 읽기처럼 여행 또한 자신이 사는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자기 모습을 뒤돌아볼 수 있고, 또한 타자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함으로써 한 걸음 성숙한 지혜를 얻는다. 그뿐만 아니라 여행 중 작은 것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 대상과 연상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이어지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쁨도 얻을 수 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 넘어 사라지고, 오색찬란한 불빛이 올드시티를 물들이자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마리아치들이 우니온 정원 주변으로 몰려든다. 오늘은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북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걸으며 높은 데 사는 현지인의 모습을 보았다. 멕시코 독립투쟁에 공을 세운 피필라 동상이 있는 전망대까지 둘러보다 보니 30여리나 걸었다. 오늘도 피로가 몰려들지만, 새로운 만남에서 얻은 기쁨으로 뇌가 만든 천연 마약 엔돌핀이 피로를 날려버린다. 문득 디오게네스(Diogenes)가 한 말이 떠오른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라고 했다. 오늘도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지도에 새로운 점 하나를 찍었다. 내일도 또 다른 기회의 순간을 찾아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즐길 기대에 젖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⑥ 동상 만들고 화폐 새기고… 멕시코가 사랑한 ‘뮤즈’

호텔로 향하는 길에 조그만 포켓 공원 벤치에 앉아 바로 앞 팔레트를 손에 들고 있는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무리 지어 이곳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이 동상을 둘러싼다. 뜻밖에도 가이드를 통하여 동상 주인이 멕시코 화폐 500페소에 새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멕시코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y Frida Kahlo)다. 그는 190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활동한 사실주의 화가로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화풍에 멕시코 특유의 정신을 잘 구현한 예술가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역시 화가로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떼어놓을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멕시코 500페소 화폐 전면에는 디에고 리베라가 뒷면에는 프리다 칼로가 새겨진 것을 볼 때 이들이 멕시코 예술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한다. 이처럼 화폐에는 그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과 상징성이 돋보이는 유적을 새기는 것이 보편적이다. 여행하는 나라의 화폐만 잘 살펴보아도 그 나라 역사와 유물, 주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듯이, 멕시코 화폐에도 예외 없이 주요 인물과 유적이 새겨져 있다. 과나후아토 구시가지는 과거 콜로니얼시대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를 당한 안타까운 역사의 산실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선조의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여러 나라에서 이곳을 찾은 관광객을 상대로 삶을 이어간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그들에게 과거는 이제 잊어버린 역사가 됐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며 미래를 향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⑤ 피필라 전망대서 울긋불긋 구시가지 한눈에

많은 사람이 이미 피필라 전망대에 올라 붐비고, 뷰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으려 순서를 기다린다. 차례가 돼 방향을 바꿔가며 기념사진을 몇 컷 찍는다. 근육질 남자 피필라는 횃불을 높이 들고 있는 커다란 동상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세워졌다. 그는 1810년 9월28일 미겔 이달고 신부가 이끈 독립전쟁 초기에 영웅적인 행동으로 이 지역 전투에서 맹활약한 독립투사다. 피필라가 손에 쥐고 있는 횃불은 ‘자유의 횃불’로 당시 침략자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였던 상징이다. 피필라는 에스파냐가 과나후아토 광산의 광부였다. 그는 독립전쟁 당시 에스파냐군의 소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여 편평한 돌판을 등에 진 후 타르와 횃불을 가지고 수탈한 은과 광물을 보관한 창고 ‘알론디가’(Alhóndiga)로 돌진해 출입문에 불을 질러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이 지역 광부들이 이달고의 독립투쟁 대열에 동참하는 촉매 역할을 함으로써 훗날 멕시코 독립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이곳은 과나후아토의 랜드마크가 됐고, 여행객은 한 번쯤 전망대에 오른다. 이곳에 오르면 웅장한 중세 교회와 고건축물, 그리고 울긋불긋한 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한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오래 머물면 혹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까 염려돼 힘들게 오른 전망대를 뒤로 하고 내려간다. 가는 길은 몇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대충 방향을 가름 잡아 내려가다 보니, 키스 골목을 거쳐 ‘우니온 정원’ 앞 ‘후아레스 극장(Treatro Juarez)’에 다다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④ 뜻밖의 만남 ‘돈키호테 박물관

엊그제 가까운 후배로부터 보이스톡 전화가 왔다. 멕시코 여행 중이라고 하자,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돈키호테”라고 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피필라 전망대로 가는 길에 예기치 않게 돈키호테와 산초가 말을 타고 있는 커다란 청동상을 만난다. 번뜩 에스파냐에 있어야 할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이 왜 이곳에 있을까 생각한다. 돈키호테 박물관(Quijote Iconographic Museo)은 1987년 수집가 에우랄리오 페러 로드리게스가 재치가 넘치는 돈키호테(Don Quijote de la Mancha)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과나후아토 구시가지 중심에 테마 공원처럼 세운 곳이다. 박물관에는 돈키호테와 연관된 유화, 아크릴 판화, 소묘, 청동 조각, 동전, 태피스트리, 수공예품, 도자기 등 800점이 넘는 방대한 수집품이 있고, 작품의 중심 주제는 고독한 돈키호테의 모습으로 혼자나 산초와 함께 등장한다. 전시된 작품에 대한 정보와 함께 상설 전시회장에는 당시 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는 16개의 전시실과 안뜰 정원에 다양한 조각상이 배치돼 있다. ‘슬픈 표정의 기사(Chevalier de la Triste Figura)’ 돈키호테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세르반데스는 그를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이성의 하나인 친절을 통해 순수 예술의 다양성뿐 아니라 모험 이야기로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 고전 명작을 만들어냈다.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오른다. 가파른 언덕길을 30여 분 걸어 오르자 역사 지구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피필라 전망대에 도착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③ 장인 숨결 깃든 정교한 미니어처 수공예품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지역 역사성과 예술적으로 가치를 지닌 미니어처와 고대 유물, 멕시코의 유명 화가의 작품이 눈에 띈다. 특히 옥수수 껍질, 나무, 뼈, 점토, 천, 야자나무, 철사, 납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미니어처 수공예품이 있고, 미니어처 컬렉션의 섬세한 디테일을 감상할 때, 이 지역 장인의 수준 높은 손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2층 전시실에는 과나후아토 지역 문화재 발굴과정에 출토했거나 소장한 민예품 등 다양한 민속 문화재, 가톨릭 성화와 미사 예절에 사용했던 성작(聖爵) 등 중세 시대 종교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지해 오로지 눈으로 보고 기억에 의존해야 하고, 안내 팸플릿도 없으며, 작품 해설 책자도 판매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민속 박물관을 나와 이달고 시장에서 멕시코 서민 음식 타코로 점심을 든든하게 해결한다. 맛도 맛이지만 가격도 우리 돈 4천원 정도로 저렴하고, 가격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래서 멕시코 저소득층이 먹는 것 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과나후아토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피필라 전망대(Monumento al Pipila)를 향해 걷는다. 이곳에 오르는 방법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오를 수도 있지만, 걸어서 올라간다. 가는 길에 크고 작은 포켓 공원을 만나고, 곳곳에는 의미 있는 동상을 여럿 만난다. 이 지역 출신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명사의 흉상이나 전신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을 세우는 데는 정치적 이념이나 당파적 이해관계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념과 정치적 잣대로 기준을 정하기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 역사 속 인물을 제외하고 근현대 인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② 시대 초월한 ‘과나후아토 민속박물관

미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주말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에 들러 사과와 토마토, 그리고 당근과 오이를 샀다. 110페소에 제법 많은 양을 샀다. 우리나라 가격의 3분의 1 정도여서 물가가 싸다는 것을 체감한다. 호텔에 짐을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도보여행에 나서 호텔 옆에 있는 민속박물관(Museo del Pueblo)으로 간다. 입구에서 시니어 티켓 두 장을 샀다. 밖에서 보기에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안으로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전시 공간이 1, 2층에 가지런히 배치돼 있다. 박물관은 1776년 추리구레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전면이 있는 예배당과 마르케스 데 라이아즈 저택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중세 건축물로 건축가 펠리페 데 우레나가 지었다. 두 건축물은 서로 다른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1979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박물관은 1, 2층으로 나눠져 있고, 1층 전시실에는 18세기와 19세기의 그림을 전시하는 5개의 방이 있다. 이곳에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메스티소 출신 화가로 특히 초상화를 잘 그린 에르메네질도 부스토스 갤러리가 있다. 그는 관통하는 심리적 힘을 원천으로 세월의 흐름과 시대를 초월하는 감정을 담고, 캐릭터의 몸은 필요한 만큼 크기로 축소하며, 손은 물건을 잡는 데 집중함으로써 또 다른 정체성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특징을 가졌다. 에르메네질도 부스토스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작품은 파리, 런던, 멕시코시티, 도쿄, 스톡홀름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발표됐다. 1층 전시실에는 이곳 과나후아토 출신 화가 호세 차베스 모라도의 갤러리가 있고, 그 외에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잘 그렸던 리베라, 오로스코와 함께 벽화 예술의 선구자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4-① 스테인드글라스 화려한 빛의 향연

주일미사에 참례하러 호텔 부근에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갔으나 이미 미사가 끝나가는 터라 이웃에 예수회가 설립한 ‘산 펠리페 네리의 예수 성심 교회’로 간다. 이곳은 방금 미사가 시작돼 조용히 뒷자리에 앉는다. 여행 중 주일미사에 참례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왠지 마음이 편안하다. 미사 예절은 에스파냐어로 진행하지만, 예절은 전 세계 어느 곳에 가나 똑같아 부담 없이 따라할 수 있다. 미사 후 성당 안과 밖을 둘러본다. 이 교회는 누에바 에스파나 시절인 1765년 예수회가 세웠으며, 중남미 지역에 세운 수도회 소속 교회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성당은 중앙 제대와 좌우에 작은 예배당이 있는 정형적인 가톨릭교회 구조다. 잠시 의자에 앉아 성스럽고 화사한 돔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한다. 가톨릭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과 색을 통해 균형과 조화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창을 통과한 빛은 미묘한 굴절과 투과로 신비로운 매력에 빠진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긴 내용은 대부분 성경 속 사건이나 성인의 거룩한 삶을 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교회 건축에 있어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심적 요소로 건축양식과 조화를 이룬다.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국가에서 출발했지만, 에스파냐가 중남미 지역을 식민지화한 1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도 함께 발달했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크고 작은 교회에서 예술적 가치가 넘치는 다양한 형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쉽게 만난다. 성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 외에도 오래된 십자가와 성모를 비롯한 여러 성인상이 모셔져 있고,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중앙 제단은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빛바랜 성화와 오르간은 이곳이 중세 시대 교회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리매김하고 있다. 교회 밖으로 나와 외관을 감상한다. 교회 정면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고, 상단 파사드는 섬세함과 화려함을 넘어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넘친다. 이 교회는 에스파냐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만큼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정교한 조각으로 만든 추리구레스크 형식의 교회 전면은 극단적이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하고 화려해 고건축학적으로는 에스파냐 바로크 건축 양식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⑥ 돌로레스 이달고 ‘독립 갈망’ 동병상련

‘돌로레스 이달고’시는 지리적으로 과나후아토와 산 미겔 아옌데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식민시대를 종식하는 ‘돌로레스 절규’를 외친 미겔 이달고가 품은 역사적인 의미가 깃든 곳으로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독립투쟁의 성지 같은 도시다. 하루 일정으로 둘러보고 근대 멕시코로 출발하는 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기억하며 과나후아토로 떠난다. 세계사를 강자와 약자라는 이분법으로 살펴보면 힘이 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범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강대국은 약소국을 영원히 지배하지 못했다. 약자는 투쟁을 통해 주권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곧 깨닫게 된다. 중남미 여러 나라는 근대사에 에스파냐와 유럽 강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많은 투쟁의 역사가 있다. 특히 북미에서부터 중미까지 넓은 영토를 가졌던 멕시코도 우리의 3·1 운동처럼 항쟁해 독립을 쟁취한 역사적 사실을 돌로레스 이달고에서 보며 동병상련의 정감을 느낀다. 밖은 이미 어둠이 깔렸다. 차창 밖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문득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시대 아테네 동맹국이 약소국인 작은 섬나라 멜로스를 쳐들어가 항복을 요구하자, ‘아테네와 스파르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라며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으나 아테네 대답에서 약소국의 서러움을 느낀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자연의 법칙은 이전부터 있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입장을 바꿔 당신이 강대국이고 우리가 약소국이라면, 당신도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라는 매몰찬 대답에서 보듯이 어느 나라든 부국강병은 그 어떤 것으로도 피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다. 오늘도 인식과 습관이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체험한 하루다. 과나후아토 신시가지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 내려 내일 아침 일찍 ‘산 미겔 아옌데’로 갈 버스표를 예매하고, 숙소로 돌아갈 시내버스를 탄다. 20여분 지나 구시가지 지하터널 입구에 내려 우리네 재래장터 같은 ‘이달고 시장’에서 현지식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다. 어둠 속 과나후아토 밤의 열기를 뒤로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를 떠올리며, 내일 여정도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길 기대하며 달콤한 잠자리에 든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⑤ 교회 속 ‘독립투쟁’ 흔적 고스란히

대성당 앞 광장에는 당시 주민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했던 신앙의 구심점으로 멕시코 가톨릭 신앙의 수호성인인 ‘과달루페의 성모상’ 배너를 왼손에 들고 절규하는 형상의 미겔 이달고 신부의 대형 청동상을 세웠다. 식민시대를 종식하기 위한 독립투쟁 출발지가 이곳이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함이다. 미겔 이달고의 흔적을 둘러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 젊은 부부의 혼배 미사가 진행 중이라 잠시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며 화려한 천장의 프레스코 벽화를 감상한다. 중앙에는 나사렛 성지를 형상화해 그렸는데, 나무문으로 들어가면 선과 악 사이의 대립을 형상화했고,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빈 곳 없이 빼곡히 그린 벽화로 가득하다. 교회는 이 지역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6개의 부속 예배당과 다양한 성화, 이젤에 걸린 그림, 금박 제단, 조각상이 배치돼 있고, 작은 기도 공간도 여러 곳에 있으며, 뒤편 2층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파이프 오르간이 배치돼 있어 돌로레스 이달고 시민이 즐겨 찾는 영혼의 안식처다. 아토토닐코 대성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교회의 영향을 받아 1740년 루이스 펠리페 네리 신부가 설계하고 감독한 작품으로 그의 학문과 교리적 가치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18세기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을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교회 내부 평면은 중앙 대성당의 돔 아래 중앙에 제대가 있고, 좌우에는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배치함으로써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를 형상한 전통적인 가톨릭교회 형태다. 주변에는 회랑으로 이어진 교회 부속건물을 배치해 교회 건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교회 앞 커다란 광장으로 이어진다. 교회 건물 전면 출입문과 시계 탑 그리고 좌우에 배치한 종탑의 석조 부조는 신앙적 의미를 떠나 정교하고 아름다워 거대한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하고, 이런 대형 작품을 구상하고 조각한 그들의 구상과 솜씨에 감탄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교회 내·외부는 다양하고 풍부한 예술성과 작품성을 갖추고 있어 18세기 중반 교회를 설계하고 감독한 루이스 네리 신부와 내부 벽화를 그리고 외부 부조를 조각한 예술인들에게 깊은 찬사를 보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④ 멕시코 독립의 시작… 돌로레스의 절규

‘돌로레스 이달고 박물관’은 멕시코 독립 투쟁의 영웅인 미겔 이달고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곳으로, 독립 투쟁 당시 화살과 전투 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 전투 장비와 투쟁을 위해 주민을 교회로 부를 때 사용하였던 종이 전시돼 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박물관이라기보다 혁명 당시 소박한 모습을 재현한 기념관이다. 이 도시는 미겔 이달고를 떠나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관이 깊고, 그 표징은 ‘돌로레스 이달고 시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문장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4개의 삼각형 분기가 하나로 구성돼 있는데, 중앙 상단에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과달루페의 성모상’ 배너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처형되기 전 8년간 사목한 아토토닐코 교회로 간다. 이곳은 1810년 9월16일 주일 새벽 미사에 참석한 600여명의 신자들 앞에서 “증오스러운 에스파냐 사람들이 여러분 선조로부터 빼앗은 땅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정복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돌로레스의 절규’를 선포한 교회다. 미겔 이달고 신부가 요란하게 교회 종을 울리며 신자들과 함께 교회 앞 광장으로 나가자 주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지금 곧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라며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원주민의 항쟁을 촉발했다. 그 후 지지자들이 늘어나자 에스파냐 군대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체계적인 전투 장비도 없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 투쟁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원주민과 메스티소 중심으로 혁명군을 꾸려 독립투쟁을 시작했으나, 사회 지도층인 크레올로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항쟁 1년 만에 칼데론 전투에서 패한 후 포로로 잡혀 처형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멕시코 반도 남부지역에서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 소속 군인이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821년 코르도바 조약을 끌어내는 초석이 됐으며, 그해 멕시코와 중미지역 나라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미겔 이달고는 훗날 멕시코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멕시코는 그가 ‘돌로레스의 절규’를 외친지 11년 후에 독립이 됐고, 1810년 9월16일은 멕시코의 으뜸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로 지정됐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화폐에는 두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초상과 문장을 새겨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③

산타로사를 떠난 버스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 한라산 높이인 해발 1천980m 조그만 마을에 있는 ‘돌로레스 이달고 시립묘지’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멕시코 국민 가수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의 무덤이 있어 유명한 묘지가 됐고,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이 많이 찾는다.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 여러 나라 묘지처럼 다양한 형상의 석관묘가 가지런하게 배치돼 있고 무덤 주위에는 가톨릭을 상징하는 십자고상(十字苦像)이나 성모상을 묘지에 두고 있다. 하지만 독특한 형상을 한 커다란 묘지 주위에 수많은 참배객이 줄지어 서 있다. 대형 멕시코 전통 모자 솜브레로를 형상화한 이곳은 멕시코 대중가수 히메네스의 묘비다. 묘지에는 그의 어머니도 함께 묻혀 있는 가족 묘지인 듯하고, 독특한 형상의 묘비는 그의 사위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를 기리기 위해 솜브레로를 쓰고 향을 피우는 참배객이 많다. 어느 나라나 유명한 대중 가수의 인기는 죽어서도 대단하다. 이런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묘지의 위치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묘지를 둘러본 후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멕시코 독립투쟁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돌로레스 이달고시에 도착한다. 과거 원주민 시대 이름은 ‘코코마칸’이었고, 식민시대에는 ‘푸에블로 누에보 데 로스 돌로레스’였으나 독립 후에는 미겔 이달고를 기려 ‘돌로레스 이달고’시가 됐다. 산길을 내려온 버스는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관’에 도착해 잠시 돌아본다. 마침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200여 년 전 독립투쟁을 토의하는 듯하고, 기념관에서는 학술 토의와 공연도 한다. 과거 주지사 관저였던 건물을 10여 년 전에 개조한 것이라 매우 깨끗하다. 이어 국민 가수 히메네스가 생전에 살았던 집을 개조한 기념관에 도착한다. 당시 그가 화려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규모와 내부 장식은 당시 그가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길을 잡지는 못한다. 참관 통로를 따라 둘러보고 서둘러 ‘돌로레스 이달고 박물관’으로 간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②

배낭여행자라면 대중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괜찮은 선택이다. 10여 분 기다리자 타고 갈 버스가 도착한다. 벤츠 코치에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 20여 명이 탑승했으나 아시아인은 우리 부부뿐이다. 가이드는 오늘 둘러볼 곳과 방문할 명소를 설명한 후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단체가 구성됐으니 지킬 예의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과나후아토 터널을 지나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서자 구시가지가 멀리 발아래 보인다. 30여 분 달려 첫 번째 방문지인 산타로사에 도착한다. 가이드는 내리기 전에 조용한 시골 산간마을에는 약 1만여 명이 살고, 주민들이 설립한 협동조합에선 이곳에서 생산한 과일이나 열매로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생산해 수출하며, 여행객이 찾아올 땐 현장에서 판매한다고 설명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달콤한 과일향이 코와 침샘을 자극한다. 대표인 듯한 사람이 영어로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달콤한 맛을 보라고 권유한다. 상품 소개가 끝나자 각 판매 코너 판매원은 이곳의 또 다른 특산품인 꽃그림으로 장식한 예쁜 도자기에 담아 시식용 딜리셔스(delicious)를 권한다. 판매원은 아시아인을 만나자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이 제품을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바로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한다. 이곳도 우리나라 여행객이 많이 다녀간 듯하다. 여행길에 우리말 인사를 받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발걸음도 가볍다. 여행 중 간식으로 먹을 몇 가지 과일 말림과 땅콩을 골라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다. 과나후아토 시(市) 외곽 해발 1천600여m 고산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 산타로사는 멕시코 선인장에서 추출한 제품과 고산지대에서 생산한 과일로 만든 다양한 딜리셔스와 건강식품을 생산한다. 고산지대인지라 가게 밖 공기는 맑고, 옅은 구름이 끼었어도 상쾌함을 넘어 차가운 기운에 살짝 추위를 느낀다. 마을에는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시골에서 만났던 바로크 양식의 작은 중세 성당이 있어 이곳도 콜로니얼 시대를 피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타로사 산간 마을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암약했던 지역이라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든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①

어떤 나라든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를 안 가진 나라는 없다. 특히 식민 지배를 당한 나라일수록 그 상처는 더욱 깊다. 1519년 막강한 화력을 갖춘 코르테스는 수백의 부하와 11척의 선단을 이끌고 황금을 수탈하러 베라크루스 해안에 상륙해 멕시코 정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테노치티틀란으로 침공해 아스테카의 콰우테목 황제를 살해한 후, 제국을 폐망시키고 식민 지배를 위한 발판을 만들었으며, 그 후 300여년 동안 멕시코는 에스파냐를 비롯한 외세 지배를 받았다. 오늘은 과나후아토 주변에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돌로레스 이달고’를 찾는다. 호텔 매니저에게 둘러볼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후아레스 극장 부근에 가면 당일치기 투어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둘러보고 싶은 곳을 골라 선택하면 교통편 걱정 없이 편하게 돌아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어젯밤 화려했던 마리아치의 여운이 남아 있는 극장 길목에 들어선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넘치고, 솜브레로를 쓰고 후아라체를 신은 중년 남자가 상품 전단을 들고 다가와 투어 상품을 영어로 소개한다. 에스파냐 언어권이 아닌 여행자를 대상으로 중형 버스를 타고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여러 상품 중 과나후아토 인근의 시골 마을 ‘산타로사’, 멕시코 건국의 아버지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태어난 민중혁명의 출발지인 ‘돌로레스 이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아토토닐코 대성당’ 등을 둘러보는 8시간짜리 상품을 택한다. 한 사람당 500페소를 주고 티켓 2장을 산다. 그는 투어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관리인에게 우리 부부를 인계한 후, 다른 여행자를 모집하기 위해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이미 각 나라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들이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⑥

과나후아토 역사지구는 과거 원주민들이 은과 금을 캤던 광산지대로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에스파냐 콜로니얼 시절 수탈을 위해 침략자가 개발한 아픈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광산이 가져다준 부유함의 산물인 콜로니얼 건축물에서 당시 풍요롭고 화려했던 삶의 흔적을 엿본다. 독립 후 광산 개발을 멈췄지만 당시에는 과나후아토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터널 형태의 수로를 만들었는데 지금 이 지하터널은 구시가지를 보호하고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차도로 변신해 여행객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여행을 즐기면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도움은 즐겁고 정겨운 여행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처럼 스스로 찾아가는 여행은 기쁨을 채울 수 있고, 체험하며 얻은 만족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되며 여행으로 얻은 행복은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뇌리에 쌓인다. Happiness(행복)의 어원은 Happen(발생하다)이고, happy의 어근인 hap에는 chance(우연), luck 또는 fortune(운·運)이라는 의미가 있다. 어원과 어근을 살필 때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얻거나 스스로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 한발 먼저 얻을 수 있다는점을느끼게된다. 출발할 때 과나후아토는 과달라하라에 비하면 작은 도시라 여정을 짧게 잡았으나 쿠바 아바나 인근 핀카 비히아에 있는 헤밍웨이 박물관에서 만난 독일 청년의 권유를 받고 일정을 조정했는데 잘한 결정인 것 같다. 과나후아토에 도착한 첫날 밤 짧은 시간 역사지구를 둘러 보니 앞으로 찾아갈 주변 여행지가 더 기대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중심이자 여행객에게 인기 있는 우니온 정원은 아름다운 상록수로 감싸져 있고, 중앙에는 키오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성 프란시스코 교회가 있었으나 허물고 산티아고 플라자를 지었다. 그 후 1861년에는 벤치와 키오스크를 설치하고 예쁘게 조경해 아름다운 중세 정원으로 탈바꿈됐고 주변 중세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원 주변은 가톨릭 신자들이 즐겨 찾는 ‘과나후아토 성모 대성당’이 있고, 19세기 후반부터 도시 문화를 이끌어 온 유서 깊은 ‘후아레스 극장’이 있으며, 그 뒤로는 역사 지구를 감싼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삐삐라 동상’이 보이는 최고의 명소가 있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는 사시사철 여행객으로 붐비고, 금요일 밤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넘쳐난다. ‘불타는 금요일’의 여행객들은 중세 시대 마법의 성에서 펼치는 축제에 흠뻑 빠져들고, 그들은 귓가에 감도는 아름다운 마리아치 무리의 선율에 따라 덩실덩실 길거리 춤사위를 펼친다. 주변 레스토랑에는 코와 혀를 자극하는 멕시코 전통 음식과 함께 테킬라를 즐기며 여행의 멋과 맛을 즐기는 멋쟁이가 넘친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중심인 우니온 정원 주변은 콜로니얼 시대 조성한 유럽풍 광장과 거리가 있고, 주변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교회와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곳을 찾는 여행객은 과나후아토에서 만나는 ‘에스파냐풍 중세도시’라고 예찬한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조명 불빛이 밝아지자 역사 지구 전체가 마치 마법의 성으로 변신한다. 거리 곳곳에는 여행자가 넘실거리고,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 소리는 밤물결을 타고 출렁이며, 세계 각지에서 이 밤을 즐기려 찾아온 여행객이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 한마음으로 리듬을 탄다. 이곳의 에스파냐풍 건물은 과거 중남미 지역에 산재한 콜로니얼 도시 건축 양식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고, 과나후아토대학 옆 골목길에 있는 라콤파냐 성당과 라 발렌시아나 성당은 중남미에 있는 바로크 건축물의 걸작으로 꼽힌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④

대성당을 둘러보고 마리아치 연주 소리를 찾아 우니온 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는 길은 이미 여행객이 넘쳐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다. 마리아치의 고향 과달라하라와 멕시코시티 가리발디 광장에서도 이렇게 많은 마리아치 무리와 여행객을 만나지 못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리아치가 현란한 복장을 하고 여행객들이 흥겨워할 곡을 연주하며 함께 노래와 춤사위를 펼친다. 마리아치 악단 투어 손님을 모집하는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손에 들고 있는 전단을 보여주며 프리워킹 투어 티켓을 사라고 권유한다. 후아레스 극장 주변에는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를 돌며 기타 연주와 노래하는 악사들이 있다. 이들은 ‘까예호네아다’라 불리는 과나후아토 대학생 공연 그룹인 ‘에스뚜디안띠나 과나후아토’다. 이들 그룹은 중세 복장을 하고 거리를 거닐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워킹 세레나데’라고도 하는데, 매일 밤 8시 우니온 정원을 출발해 연인의 비극이 담긴 키스 골목 ‘까예혼 델 베소’ 등 과나후아토 구시가지 좁은 골목 이곳저곳을 돌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과나후아토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키스 골목을 마주한 집에 살았던 멕시코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에는 절로 사랑의 슬픔에 빠져든다. 좁은 골목의 발코니에는 과나후아토 출신 광부 청년과 스페인 귀족 출신 여인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며 부모 몰래 밀회를 즐겼으나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젊은 연인이 서로 껴안고 입맞춤하며 인증 사진을 찍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워킹 세레나데는 에스파냐어로 진행하며, 그들을 따라 걸으며 숨겨진 명소도 구경하고, 수준급 연주와 노래를 감상하는 것도 이곳에서 즐길 거리다. 이 길거리 공연을 즐기려면 공연 초반에 120페소를 부담해야 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③

어둠이 내리자 창밖 어디선가 마리아치의 요란한 악기 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피로도 잊고 연주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라파스 광장으로 나간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역사 지구 중심에는 에스파냐가 만든 광장이 있고, 주변에는 중세 시대에 지은 오래된 가톨릭교회가 자리하고 있으며 멕시코에서 만난 도시도 예외가 없다. 나지막한 광장 위쪽에는 과나후아토 성모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 안 밝은 불빛이 스테인드글라스에 투영돼 창밖으로 넘치고, 때마침 미사 끝자락 성가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소리 죽여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시 뒷자리에 앉아 남은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본다. 역사지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성모 대성당은 과나후아토시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다. 이 교회는 1671년 건축을 시작해 1696년에 완공했다. 건축 양식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돼 있고, 내부는 전통적인 가톨릭 양식인 라틴십자가 형상이며 본당·돔·익랑(翼廊)과 두 개의 종탑이 정문 좌우에 있다. 이 교회는 마을 광부들의 성금으로 세웠다. 제대 중앙에는 7세기에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 장인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을 삼나무로 만든 1.15m 크기의 고대 성모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아랍인이 그라나다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이슬람교도들에게 손상될 것을 염려해 지하 동굴에 숨긴 것이 16세기 중반에 발견돼 에스파냐 황제 카를로스 1세에게 넘겨졌다. 그 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자신에게 보내온 금과 은에 대한 감사 표시로 과나후아토시에 1557년 성모상을 선물했고, 대성당이 완공된 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고대 종교 유물이다. 매년 8월8일 고대 성모상이 과나후아토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②

잠시 대기실에서 비를 피한 후 역사 지구에 예약한 숙소로 가려고 했으나 비가 그치지 않는다. 체크인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버스를 탄다. 한 청년에게 예약한 숙소를 이야기했더니 친절하게도 내릴 곳을 알려줘 쉽게 정류장에서 내린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역사 지구에 들어서자 그쳤다. 중세 콜로니얼 건물을 개조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한 달여간 쿠바와 멕시코 여행길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과나후아토에 5박6일간 머물 계획이다. 호텔에 부탁해 별도로 책상을 침실에 들여놓고, 여행지에서 얻은 자료 정리와 글을 쓰면서 쉬엄쉬엄 주변 명소를 돌아보기로 한다. 과나후아토는 주도(州都)로, 멕시코시티와 과달라하라 중간 지점 산악지대에 있고, 약 5만명이 살고 있다. 과나후아토의 명칭은 타라스코족 언어에서 연유한 것으로 ‘개구리 언덕(Quanax-juato)’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에스파냐 식민 지배를 당하기 이전에는 오토미, 치치메카, 타라스코족이 거주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원주민 광부들이 소규모 채광을 이어가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즈텍족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채굴된 금과 은 등 귀금속으로 지배층의 장신구를 만들며 살았다. 1548년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초기 이곳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자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수천명의 채굴꾼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세계 최대 은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고, 역사 지구에는 그 당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식민 지배를 당하던 초기 전반적으로 도시는 커지고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하층민은 가난에 허덕이며 삶은 날로 팍팍해져 갔다. 18세기 말에는 과도한 세금 부과에 저항한 시민들이 생산된 은 중 에스파냐 왕에게 바칠 은 저장고인 카하 레알을 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과나후아토는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중 지향적 가톨릭 사제인 미겔 이달고가 1810년 9월에 정부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치렀던 혁명 투쟁의 발원지고, 콜로니얼시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식민도시로 도시 전체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멕시코 근대사의 중요한 명소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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