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왕권시대에는 왕의 호칭에 태조(太祖)·정조(正祖)·태종(太宗)·세종(世宗)과 같이 조(祖)나 종(宗)을 붙였는데 이러한 호칭이 그 왕들의 이름은 아니다.
왕들이 죽은 뒤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 사당에 붙인 칭호로 묘호(廟號)라고 했다. 묘호는 그 왕이 죽은 뒤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조정에서 대신들이 추천하고 왕의 결재를 받아 정했다.
‘조’나 ‘종’을 붙이는 원칙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했는데 공이 많은 임금은 ‘조(祖)’, 덕이 많은 임금은 ‘종(宗)’자를 붙였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한 원칙이다. 공이 많은지 덕이 많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은 한 왕조를 건국하였거나 거의 망한 왕조를 부흥시킨 왕에게만 ‘조’를 붙이고 기타 왕들에게는 ‘종’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태조(왕건)외에는 모두 종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조’를 붙이는 것이 ‘종’을 붙이는 것보다 더 권위있고 명예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후계자인 왕이나 실세 신하들이 아첨하느라고 억지로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격이다.
조선 왕조 10대 왕으로 조신유생(朝臣儒生)간에 당쟁이 격심한 혼란중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폭군으로 지탄받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연산주(燕山主·1476∼1506·재위 1495∼1506), 그리고 조선 15대 왕으로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서인파에 의한 인조(仁祖)반정으로 폐위된 광해주(光海主·1575∼1641·재위 1608∼1623)는 군(君)으로
봉작돼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해 묘호가 없다. 당쟁에서 이긴 쪽의 권세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예나 오늘이나 냉혹하고 인정사정 없는게 당쟁이다.
/淸河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