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송화군 출신인 72세의 Y씨는 1953년 전북 군산에서 미군부대 노무자로 일하다가 육군 첩보부대 제1교육대 2기생으로 북파공작원 길에 들어섰다.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피란길에서 가족과 헤어졌다.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직장 구하기가 어려운 Y씨에게 “돈 많이 주고 미래도 보장해 준다”는 조건은 꿈만 같았다.
3개월간 훈련 끝에 강원도 속초의 36지구대에 발령받아 ‘활동’을 시작했다. 계급이나 군번은 없었다. 정전을 목전에 두고 ‘숨겨진 전쟁’에 투입된 Y씨는 1959년 7월 ‘해고’될 때 까지 10여차례 북방 한계선을 넘나 들었다. Y씨는 마지막 공작이었던 1958년 3월 고성지역 작전에 투입됐다. 새벽녘 동료 4명과 함께 인민군과 총격을 벌였고,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성남시에서 살고 있는 Y씨는 이때 왼쪽 무릎에 박힌 파편을 빼지 못해 지금도 주사제와 약을 복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참으로 비정했다. 공사장 인부와 경비원 자리도 다리를 절룩거리는 Y씨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파출부, 식당일 같은 허드렛일로 아내가 생계를 꾸려가고 세 남매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사회적응에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동료들의 소식이 간간이 전해져 왔다.
6·25 전쟁중이던 1952년부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활동한 ‘북파공작원’은 1만여명에 달한다. 이 중 실종자 7천726명을 제외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사회적 냉대 등으로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족에게조차 과거를 털어놓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 한계를 넘는 훈련을 받고 생명을 바쳐 국가에 헌신한 북파공작원 출신들을 홀대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59년 이전 활동자에 한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그래서 하루 빨리 개정돼야 한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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