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씨의 永眠

1981년 겨울, 어느날 오후 갑자기 폭설이 쏟아져 서울시내 교통이 금시 마비돼 차타고 가는 것보단 걷는것이 더 빠를 지경이 됐다.

제3한강교에서 차를 내려 측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충체육관까지 걸어 당도했다. 여자배구 정상의 숙적 미도파팀과 대전하는 현대팀 선수의 격려를 위해서 였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아산(峨山) 정주영씨의 성격은 그런데서도 나타났다.

어제 서울 중앙병원에서 7천 여명의 각계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영결식에 이어 하남 창우리선영에 안장됐다. 발인 전날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조화와 조전을 지닌 거물급 조문단이 특별기편으로 빈소를 다녀갔다. 중국은 국가차원의 애도를 표하고 주한공관의 많은 대사들이 조문했다.

국민경제 개발의 거목, 아산의 말년은 남북관계 민족화해의 시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 더욱 빛난다. 북측 조문단은 정부관계자와도 비공식 접촉을 가진것으로 알려졌다. 장관급 서울회담 무기연기이후 잠잠했던 남북간 접촉이 조만간 재개될 전망이다. 살아 생전에 남북소통의 물꼬를 튼 그는 죽어서까지 교량역할을 했다. 북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것은 금강산 근처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아호 ‘아산’은 강원도(북쪽) 통천군 아산리라는 산골 고향마을 이름이다. 소년시절의 고향 이름을 아호로 쓴것을 보면 얼마나 가보고 싶었는가를 알수 있을것 같다. 결국 고향에 다녀올수 있었던것이 오늘의 대북사업 계기가 됐다.

아산은 건설현장의 근로자들과도 씨름을 곧잘 했을만큼 무척 소탈했던 분이다. 한동안은 체험적 생활철학, 경영철학을 재미있게 얘기해 특강 초빙강사로 인기를 끌었다. 재미가 있었다는 것은 꾸밈이 없다는 것, 즉 진실이 듣는이의 시금을 울렸다는 뜻이된다.

20년전 제3한강교에서 장충체육관까지 눈길을 재촉해 걸었을때가 예순여섯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청춘이었던것 같다. 영면한 그를 돌이키면서 해맑은 웃음으로 온몸의 눈을 털며 갑자기 나타나 스포츠기자들을 놀라게 했던 모습이 새삼 눈앞에 선하다. 부디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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