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사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 어디로 갔나, / 밥상을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 넙치지지미 맴싸한 냄새가 코를 맴싸하게 하는데 / 어디로 갔나, /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 되돌아온다 ./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

‘ 꽃 ’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詩 ‘ 강우(降雨 )’의 일부분이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부곡(思婦曲)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은 김춘수 시인은 최근 19번째 시집 ‘ 거울속의 천사 ’를 펴냈는데 수록작품 89편 거의가 아내를 생각하는 순애보들이다.

김춘수 시인은 “ 어릴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 천사 ’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은 낯설고 신선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릴케의 ‘ 천사 ’를 읽게 됐다. 릴케의 천사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그런 천사였다. 역시 낯설고 신선했다. 나는 지금 세번째의 ‘ 천사 ’를 맞고 있다. 아내는 내 곁을 떠나자 천사가 되었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는 낯설고 신선하다. 아내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내는 그런 천사다 ”라고 말한다.

‘ 대치동의 여름 ’이라는 시도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 내 귀에 들린다. 아직은 / 오지 말라는 소리, 언젠가 네가 새삼 / 내 눈에 부용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 불도 끄고 쉰다섯 해를 / 우리가 이승에서 /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 그것, / 새삼 내 눈에 눈과 코를 달고 / 부용꽃으로 볼그스럼 피어날 때까지, // 하루 해가 너무 길다. ”

55년을 해로한 부부가 죽음으로 서로 갈라져 살 때 얼마나 긴 하루가 시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해말 타계한 미당 서정주 시인이 우리의 전래 정서, 한(恨)을 승화시켜 구원에 이르렀다면 김춘수 시인은 릴케의 순수서정과 실존철학·현상학 등 서구 시정신과 지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사물에 주어진 인간적 의미를 지워가며 사물을 사물 자체로 돌리는 해탈의 세계로 나갔다.

교수·국회의원을 지낸 김춘수 시인의 ‘ 거울속의 천사 ’는 부부들이 함께 읽으면 좋은 망부곡(亡婦曲)이다. 아내를 천사로 생각하는 지순한 사랑이 부부애를 조용히 일깨워준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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