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시 학도병이 최초로 참전한 곳은 1950년 6월28일 한강방어선이다. 이틀뒤인 6월30일엔 수원에서 5백여명이 지원, 비상학도대가 결성됐다. 서울 및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의 재학생들이었다. 이후 전국의 중학생(그땐 고등학교가 없는 5년제) 상급학년 가운데 많은 수가 학도병으로 출전했다. 미처 군복으로 갈아 입지못한 채 교복을 입고 참전, 장렬히 산화한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육탄 돌격으로 인민군의 탱크를 폭파하고 함께 전사한 학생도 많았다. 가장 많이 희생된 작전은 포항전투로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학도병은 북한의 원산등지까지 북진했다가 1951년 3월 이승만대통령의 복교령으로 해산돼 학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사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은 군번이 없는 이유로 유족들은 지금껏 연금 혜택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 포항등 격전지에 위령탑을 세우거나 학교에 따라 명예졸업장을 추서하는 것으로 그쳤다.
학도호국단이란게 있다. 1951년8월24일 중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발족, 1960년5월에 폐지됐다가 1975년 고등학교에 한해 부활됐다. 학생의 자치능력 배양과 사회봉사 및 애국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학도호국단을 운영하는 고등학교는 전국 어디에도 없다. 다만 국무총리실 산하 비상계획위원회가 전시에 대비해 서류상으로 편성, 도상 훈련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교원단체 일각에서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비록 서류상이라 해도 본인 모르게 동원되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 세월이다.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학도호국단의 도상훈련에 ‘인권침해’를 말할 만큼 전쟁의 참화가 망각됐으니.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방은 전방대로 후방은 후방대로 생사의 갈림길뿐 인권따윈 한가한 잡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무서운 전쟁을 막음으로써 인권을 지키는 길은 힘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 ‘유비무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평화는 스스로 지켜야지 누가 평화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51년 전처럼 학도병 지원이 밀물처럼 일 것인지, 가상조차 하기싫은 전쟁이지만.
/白山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