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 공개

소도시 한적한 오솔길에서 식료품을 사들고 가던 소녀가 두 건달들에게 무참히 윤간당한다. 작업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된 딸이 “식료품을 망가 뜨려서 죄송해요…”하는 말에 오열을 터뜨린다. 마침내 범인들이 보석신청을 내어 석방이 거의 확실해진 분위기속에 보석신청 심리를 받으러가는 두 범인을 향해 아버지는 기관총을 난사해 죽이고 만다. 통분을 참지못한 부정으로 살인죄를 진 아버지는 ‘무엇이 정의냐’며 고독한 법정투쟁을 벌인다. 미국 영화 ‘타임 투 킬’이다. 조엘 슈마허 감독에 사무엘 젝슨이 아버지역을 맡았다.

성범죄자 명단이 공개되자 찬반 양론속에 부작용이 여간 심각하지 않다고 한다. 아버지가 성범죄자인 것을 알게된 딸이 가출을 하는가 하면 아내마저 역시 행방을 감춘 사례가 적잖다는 것이다. 본인도 이미 죄의 대가를 치룬데다가 명단까지 공개되는 것은 이중 고통일 것이다. 아무 죄없는 가족이 누구의 아버지, 아무게의 남편이 이런저런 성범죄자로 알만한 사람에게 공개되는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반대하는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불행을 싹틔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형사정책 역시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문제의 해답은 어느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사회 공익에 우선하느냐에 있다. 만약에 반대론자가 피해자의 부모라면 그래도 반대할 수 있을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영화 ‘타임 투 킬’의 소녀 아버지는 영화속에서만 있는게 아니다. 미국에만 있는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 주변에도 그런 위험요소는 다분하다. 성범죄자는 신상공개로 본인뿐만이 아니고 가족들에게까지 누를 끼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움으로서 여성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공개가 부득이 하다.

인권보호가 우리보다 잘된 미국에서는 ‘여기엔 성범죄자가 삽니다’라는 팻말가지 붙인다고 한다. 우린 그같은 팻말은 안붙인다. 아버지나 남편이 일시적 과오로 공개된 가족들은 어려운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해 주기를 소망한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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