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테마>천혜의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과 극동아시아간 통로 역할을 하고있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때 국내 주요 도시와 긴밀한 관계가 요구되고 있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역인 동시에 천혜의 부동항으로 유명, 수산업·임업 등을 매개로 하는 개인사업이나 국제무역, 관광이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있다. 20여개 대학이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을만큼 우수한 인재들도 풍부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주목받는 국제무역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본보는 블라디보스톡시와 상위 지방자치단체인 연해주 일대 고려인들의 현황과 지정학적 중요성 등을 점검했다. <편집자 주>

◇천혜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주(州) 청사가 있는 도시이다. 공식적 인구는 80만명이지만 극동아시아 해군사령부에 배속된 군인 등을 감안하면 10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게 블라디 시 당국의 주장이다.

블라디는 모스크바와의 거리는 930㎞, 서울과는 750㎞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극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해상무역의 중심지중 한 곳이다.

특히 수산업과 수산가공업, 화물운송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극동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군사 요충지이기도 해 한국, 미국, 일본, 인도, 베트남이 총영사관을 설치했으며 호주, 필리핀, 방글라데시, 캐나다 등이 명예 영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블라디의 주거용 건물들은 7∼10층 규모로 오피스텔형 건물이 대부분이다. 건축된지 보통 100년이 넘어 페이트가 벗겨지고 엘리베이터가 고장난채 방치되고 있으나 균열간 곳이 전무할 만큼 오랜 세월 견고하게 해풍을 이겨내고 있다. 도심 곳곳에 40여개 단과대학 건물이 산재된 극동국립기술대학 건물은 1896년 개교돼 낡고 노후됐으나 이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다.

전체 산업 가운데 수산업의 비중이 50%를 차지하고 명태와 연안 수산물이 무궁무진하나 어선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같은 중요성을 인식, 중국은 자국민이 연해주 일대를 관광할 경우 소요 경비 가운데 75%를 지방정부에서 보조하고 있으며 북한은 대표부를 상호 설치하기 위한 전단계로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이 지난 2일 블라디를 방문했다.

중국은 극동 방향 3억 인구가 블라디 항구를 이용할 경우 물류비와 물류이동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오래전 부터 이 일대가 중국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황해의 평균 수심이 8m에 불과해 작은 배로 부산항에 물건을 옮겨온 후 다시 큰배로 물건을 옮겨 실어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 만약 러시아가 육상 교통로와 불라디항을 중국에 개방할 경우 부산항 등 국내 주요 항구의 물동량이 큰 타격을 입게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어장 축소로 수산업에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우리나라는 블라디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해주와 발해 역사

연해주에는 발해의 유적이 많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모해족이 거주하고 있던 연해주 일대를 정복했으나 당나라에 밀려 고전하다 30년후 모해족과 고구려인들이 채쟁국을 세웠다(713년에 발해국으로 변경). 발해국은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북한의 영토를 차지하고 5개의 수도와 15개 주를 설치했는데 15개주중 수아이빈의 행정중심지가 현재 2만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우수리스크시에 있었다고 한다.

10세기 중반 발해의 서남쪽 이웃인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926년 발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돼 우리 민족에 의한 연해주 일대 통치가 종료됐다.

결국 전체 발해족의 70%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20%는 고려로 돌아갔다. 고려 멸망후 연해주 일대는 1215년 까지 거란국의 영토였고 후에 금나라를 세운 여진과 몽고의 지배에 놓이게 됐다.

러시아인들이 연해주에 처음 나타난 때는 1655년으로 스테파노프의 지휘 아래 일단의 카자크 군인들이 아무르강과 순가리강 유역에서 조선인들과 마주쳤으나 1689년 청-노 사이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철수했다.

이후 1854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영토 확장을 위해 극동으로 진출하자, 러시아 푸따틴 탐험대가 연해주에 나타났고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로 병합됐다. 러시아는 극동 전체와 중국 북쪽, 태평양을 통제할 수 있는 블라디에 1890년 블라디보스톡시를 세워 러시아 제국의 전초기지로 성장시켰다.

◇연해주 일대 고려인

남한 면적의 약 1.7배에 이르는 연해주에는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220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19개 민족 가운데 고려인 후손들이 약 3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인으로 불리는 한인이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대거 거주하게 된것은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에 편입되고 조선에서 가뭄 홍수 등으로 터전을 잃은 난민들이 새 땅을 찾으면서 비롯됐다.

1874년 블라디보스톡 중심부에는 ‘개척리(開拓里)’라 불리는 한인촌이 형성되고, 1911년 러시아가 콜레라 근절을 이유로 개척리를 강제 철거하여 개척리가 도시 외곽(신한촌)으로 이전할 때 까지 이 일대에는 약 4만명이 거주했다.

특히 일제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면서 항일 독립운동가와 의병운동 지도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이 일대가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성장하면서 1923년까지 블리디보스톡 이외 니코리스크, 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일대 한인이 11만명으로 불어났다.

1929년 하산지역 북쪽 포시에트구에는 전체 인구중 한인이 85%를 차지했고 이들은 한글을 사용하는 한인 자치기관을 두기도 했다. 1937년에 이르러서는 블라디 하바로프스크 등에 7개의 신문, 6개의 잡지와 각종 교과서, 문학작품 등이 풀판됐고 400개에 이르는 초등학교 사범대학 기술대학 도서관 라디오방송국 등이 운영됐었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이 1937년 19만여명으로 불어난 한인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8천400여명으로 급감했다.

현재는 우스리스크에 2만명, 알춈시에 3∼4천명, 블라디보스톡 등 이외 지역에 6∼7천명 등 모두 3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한상봉기자 sbhan@kgib.co.kr

<텐유리 러시아 국가 두마의원 인터뷰>

- 연해주 일대 고려인들의 생활 실태는?

△연해주 일대에 정확히 몇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지는 파악이 안된다. 국회의원(국가 두마의원)이 나 한사람일 만큼 고려인이 이 일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은 편이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블라디와 자동차로 90분 거리에 위치한 우스리스크 지역 재래시장에서 상권을 잡고 있으나 영양력이 아직 미약하다. 한국에서 투자와 교류를 더 해야하는 이유이다.

- 지난 9월29일 부터 이달 3일까지 블라디에서 개최된 제1회 고려 문화의 날 행사에 4천∼5천여명의 고려인들이 참가했다. 이번 행사를 자평한다면?

△소수민족 행사에 이번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든 사례가 없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러시아 극동 지역은 더욱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할 것이다. 한국 전체면적에 약 1.7배에 달하는 연해주에는 기름진 넓은 땅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석탄 등의 지하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향후 5∼10년안에 어느 지역도 따라 올 수 없는 ‘희망의 땅’이 될 것이다.

- 모국인 한국에 고려인들이 희망하는 사항이 있다면?

△앞서 밝혔듯 연해주는 향후 10년안에 엄청난 나라가 될 것이다. 보다 많은 투자를 해서 고려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도움을 줘야 한다.

-앞으로 고려인들을 위해 할 일은?

△올해 처음 개최된 고려 문화의 날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한국이 우리 동족들을 적극 지원하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톡=한상봉기자 sbha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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