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온 나라안 백성의 심성이 신경질적이 됐다. 걸핏하면 싸움이 잦았으므로 민초의 일상생활이 편할 날이 없었다. 왕은 생각끝에 금언령을 내렸다. 말을 하는 사람은 극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노래를 불러 의사소통을 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나라안이 온통 노래로 가득했다. 싸움도 뜸해졌다. 가령 성깔섞인 말로 “야! 이놈의 ××야”할 것 같으면 상대의 성질을 돋울 것인데도 말은 같을 지라도 노래말로 곡조를 부쳐 느릿느릿 하게 의사를 전달하다 보면 노래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성질이 풀려 결국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어느 옛날 얘기로 물론 가공담이다. 하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베토벤의 월광곡은 앞 못보는 어느 소녀를 위해 작곡된 것이었고 우리 전래의 판소리 수중가는 용왕에게 잡혀간 토끼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월광곡은 서정적이고 수중가는 해학적이다. 앞 못보는 소녀를 위한 월광곡이 서정적이고 토끼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노래로 쏟아내는 해학은 다분히 반의어적 기법인 것이다. 흔히 쓰는 말로 “좋아 죽겠다”는 말이 있다. “우스워 죽겠다”고도 한다.

인간의 정서는 이처럼 반의적 표출로 자신의 감정을 달래려는 잠재본능이 있다. 그래서 슬플 때 오히려 기쁜 노래를 하고 기쁠 때 오히려 슬픈 노래를 하는 것이다. 대개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감정의 충격적 변화를 노래로 달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영적 사고력의 산물이란 게 통설이다. 노래는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도 부르고 혼자 흥얼거리며 부르기도 한다. 혼자 흥얼거려도 남이 듣기 마련이어서 기왕 부르는 노래라면 잘 부르는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 역시 타고난 재주가 있어야 함으로 잘 부르고 싶다고 해서 잘 부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나 아무리 음치의 노래라도 악다구니 보다는 노래 소리가 더 듣기에 좋다. 화도 나고 속썩히는 일이 많은 사회다. 그런 가운데나마 기쁜 노래든 슬픈 노래든 노래로 마음을 달래며 인내할 줄 아는 것 또한 생활의 지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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