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조

익조라고 하여 나라새(國鳥)로 까지 지정됐던 까치가 천대받고, 흉조로 알려졌던 까마귀가 오히려 길조로 부각되는 세상(世相)이 되었다. 사실 까마귀는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도 신성한 날짐승으로 나타난다. 천장벽화 태양 가운데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다리가 세개 달린 까마귀다.

이를 삼족오(三足烏)라고 한다. 이처럼 태양을 까마귀로 상징화하는 것은 고대 문화에서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에서도 까마귀가 태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동해가에 살고 있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 가면서 신라에는 해와 달이 없어지는 괴변이 생겨났다. 왕이 사신을 보내 연오랑을 찾았더니, 하늘의 뜻으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하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건네 주었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이를 제사했더니 다시 해와 달이 생겨났다고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를 쓰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밝음의 상징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새끼 때 어미가 키워준 은혜를 잊지 않고 늙은 어미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까마귀는 효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불효를 반성하기 위해서 까마귀를 등장시킨 시조가 많이 남은 연유도 그 때문이다. 까마귀가 죽음을 알려주거나 또는 불길함의 상징으로 전락한 이유는 색깔탓인 듯 하다. 북쪽을 가리키는 색은 검정색이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저승사자가 입은 옷의 색도 그래서 검정으로 나타내는 모양이다.

검정색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된 새가 바로 까마귀다.이런 관념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확실히 정착되었다. 그 이유는 주자가 <시경> ‘북풍’에 나오는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긴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주자가례> 를 의례의 근간으로 삼은 유학자들은 주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지대자도 수년 전 중국 지안 고분벽화에서 삼족오를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일본 도쿄호텔 인근 아침 공원에서 비둘기처럼 노닐고 있는 까마귀들을 보고는 섬쩍지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라 때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세오랑 세오녀의 이야기가 마치 사실처럼 여겨진다. 민속학적으로도 까마귀가 길조로 인식돼 가고 있다. 이 또한 세태의 한 변화다.

/淸河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