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경원선의 종착역인 원산역경원선은 평원선(평양-원산)과 함께 한반도의 동서 양 해안을 연결하는 횡단철도로 경성(서울)과 원산 사이에 건설된 222.3㎞의 단선 철길이다. 출발지인 경성과 종착지인 원산의 각각 첫 글자를 따서 경원선이라 하였다. 경원선은 1910년 10월부터 1914년 8월 까지 약 4년에 걸쳐서 용산-청량리-성북-의정부-연천-철원-세포-안변-원산 사이에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914년 9월 16일 원산역에서 경원선 전구간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원선 가운데 세포-고산간을 뱀같이 꾸불 꾸불한 기어가는 모양의 완연우곡( 延迂曲)한 삼방천(三防川)계곡이기에 교량, 토목, 터널 공사가 어려웠다. 추가령 협곡의 철도건설공사시 주변에 내국인이 드물고 또한 노동을 기피하여 관아에 교섭하여 주민을 동원하고 경부선 부설시 고용된 숙력된 인부를 고용하거나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서 썼다. 경원선에 사용된 총공사비는 1천1백6십5만2천원과 그외에 재용물품비 53만7천원이 소요되었다.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리우치 마사타케사이에 한일합병 조약을 맺어 한국의 통치권을 강제로 이양 받았다. 그후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강화하고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지하자원과 물자를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반출하기 위해서 경원선 철도의 부설이 절실하게 되었다. 또 한편 경원선은 동해를 경유해서 일본의 북서부지방과 해로로 연결되며, 다시 함경선을 따라서 북상하여 두만강 연안에 이르러 국경을 넘으면 러시아의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TSR)에 연계되어 산업·군사상 막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경성과 동해안 제일의 항구인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 경목선(京木線 ; 호남선)과 비교해보아도 결코 그 가치가 낮지 않다. 따라서 그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외교전이 몹시 치열하였다.
경원선은 추가령협곡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건설되었기에 고산협곡의 험준한 지형적 장애를 상당히 극복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령 685m을 비껴 넘어야 했고, 기존 도로가 불비 하였기에 공정 전반이 쉽지 않았다. 특히 경술국치 직후라 민간인과 의병들의 저항과 습격이 잦았다. 따라서 일본인 측량대기 헌병대의 비호아래 한복으로 위장해서 철도 예정지를 측량 하기도 했다.
개통 초기에는 운송실적이 저조하였으나 삼방협곡, 금강산, 석왕사, 원산 해수욕장 등의 관광명소가 있어 계절에 따라 객차를 늘리거나 임시열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1928년 9월 1일 원산과 상삼봉을 잇는 함경선이 개통되어 경원선과 연결되자, 3∼7일씩 걸리던 서울∼회령간이 약 26시간, 서울∼청진간이 약 22시간으로 단축되어 경원선의 역할이 더 활성화 되기도 하였다.
또, 1931년 7월 1일 경원선 철원역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선 지선이 개통되자 경원선 승객이 상당히 늘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래 군사목적으로 건설되었고 강원지역이 산악지역이므로 연변의 산업이 부진한데다 그 개발이 철저히 도외시되었기 때문에 운송실적은 대체로 저조하였다.
광복 후 동북부지방의 개발이 활발해지자 큰 몫을 할 수 있었던 경원선은 6·25사변에 의한 국토분단으로 원산까지의 운행은 중단되었다. 1975년 9월에는 남한내 경원선 부분이 한달 동안에 세 번씩이나 무장간첩에 의하여 폭파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현재는 경원선이 남북간 단절되어 남한쪽에서는 의정부역 -신탄리역 사이만 운영되고 있다. 북한측에서는 강원선 이라하여 고원-문천-원산-안변-세포-평강역 사이를 현재 운영하고 있다. 즉 옛 경원선에다 원산 북쪽 문천역, 고원역까지의 철도를 더 포함하여 강원선으로 운영하고 있다.
경원선의 종착역 원산은 동한만의 정점에 있는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한 항구도시이다. 현재 인구는 30만명이고 북한의 동해안 국제 무역항이자 어항이다. 항만에는 북쪽에 호도반도가 있고, 남쪽에는 명사십리라 일컫는 사주가 발달한 약 6㎞의 갈마반도가 돌출하여 영흥만을 포옹하고 있다.
명사십리는 여름철 해수욕장으로서 유명하며 잔잔한 해면 위에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과 찬란한 물빛, 그리고 주위가 조용한 달밝은 밤, 금물결 이루는 해변은 절경이다. 북한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 193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이 반도를 백사평포, 명사라고 하였다. 백사평포란 표현은 오늘날 비치(beach)에 해당하는 것이고, 명사는 모래알이 곱고 가늘기 때문에 맨발로 딛고 걸어가면 발아래 부드러운 마찰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즉 명사십리(鳴沙十里)가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바뀐 것이다. 영흥만내에는 신도, 모도, 웅도, 여도 등 대소 20여개의 섬이 있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여 외해의 풍파를 막아주고 있다. 영흥만은 다시 송전만과 덕원만으로 갈라지는데 원산시는 남쪽 덕원만의 남쪽에 있다.
원산 항만은 물결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고 항만 시설이 완비 되어 있어서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불편이 없다. 원산시가지는 장덕산, 북망산의 구름을 등지고 해안에 연하여 남쪽으로 길게 발달되어 있다. 원산시의 중앙을 흐르는 적전천을 경계로 하여 남쪽의 옛 원산진은 연안 무역지구를 이루고, 북쪽은 시가지의 중추부로 되어있다. 이 중추부는 개항전에는 갈대밭에 불과하였는데 개항 후 매립공사와 축항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원산은 1880년에 부산 다음으로 개항하였는데 100년전만 하더라도 한산한 어촌에 불과하였다. 원래 원산진이란 유명한 항구로서 함경선 철도가 개통하기 전에는 동해북부 제일의 무역항으로 번영하여 1927년의 무역량은 부산, 인천, 신의주 다음으로 제 4위였다.
특히 옛날 일제시에는 북청 연안에서 어획되는 명태의 중계무역과 콩 수출항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함경선이 개통되어 청진항이 발전되자 그 배후지역의 축소로 발전이 주춤하게 이르렀다.
일제말기에는 나진과 함께 일본과의 사이에 동해 횡단항로가 생기고 또 평원선과 만포선이 개통됨에 따라 동북지방과 서북지방 두 지방의 물자를 수송함으로 다시 활기를 띄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8·15 광복후에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고 군항 및 어항으로서 역할을 했다. 송도원과 명사십리는 사빈해안으로서 수심이 얕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원산은 금강산, 석왕사, 삼방협곡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휴양객의 왕래가 많고 각종 문화시설이 있어 문화도시로서 성격을 띄고 있다.
원산시의 주산업은 제조업이고 그외 농업과 어업이 있다. 제조업의 경우 공장이 중청동(전기, 기계류), 신성동(화공업), 해안동(조선, 선박수리, TV, 자동차, 트랙터), 갈마동(객차, 유리, 시계, 제지, 신발류, 의류, 어구류, 어로장비 등), 복막동(방직, 의류, 신발, 식료품, 일용품, 담배), 광석동(제지, 통조림), 내원산동(옥수수 가공, 음료, 식품) 등에 위치하고
있다.
원산시의 교통사정은 양호한 편이다. 함경본선이 경유하며 함경, 평안, 강원 방면으로 간선도로가 연결되고 최근 개통된 평원 고속도로의 종점이 되고 있다. 금강산의 사실상 관문에 해당하므로 금강산 종합개발계획에 원산시의 개발도 함께 포함시켜 추진하고 있다. 강원선은 북쪽 고원역에서 시작하여 원산역, 갈마역을 지나서 남쪽 안변역에서 강원선과 동해선이 분기된다. 또 세포역에서 청년이천선과 분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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