良臣·忠臣

요사이 돌아가는 정국을 보고 있자니까 중국 고사 하나가 생각난다.

당나라 때의 명신 위징(魏徵·580 ∼643)은 당태종의 간언(諫言)담당관이었다. 위징이 어느 날 태종에게 아뢰었다. “아무쪼록 저를 양신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결코 충신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 “충신과 양신은 어떻게 다른가? ” “후직( 后稷), 설, 고도(皐陶) 등은 요·순(堯·舜)을 섬겨, 군신이 합심해서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끌고 다같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이른 바 양신입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신하였던 용봉(龍逢)이나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비간(比干)은, 신하들이 늘어서 있는 자리에서 정면으로 군주의 잘못을 간했기 때문에, 그 몸을 주살당하고 게다가 나라는 망해 버렸습니다. 이 것이 이른 바 충신입니다.”

훗날 위징이 죽자 태종은 “구리쇠를 갈고 닦아 거울을 만들면, 의관이 흐트러진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옛날을 거울로 삼으면, 국가 흥망의 원인을 알 수가 있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내 행위의 옳고 그름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위징이 죽고 없으니, 나는 하나의 거울을 잃었다”고 몹시 애통해 했다고 한다.

위징은 본래부터 태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태종과 황제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였던 태종의 형 건성(建成)의 측근으로, 건성을 위해서 태종 축출을 도모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태종은 즉위한 직후 위징을 엄중히 추구했다. 그러나 위징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신하가 주군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주장을 펴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솔직 담대한 그의 인품에 매료돼 부하로 맞아들이고 각별히 중용했다. 죽음을 각오했던 위징은 태종의 후의에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 인생, 의기(意氣)에 감동하고,공명(功名), 누가 또 논하겠는가 > ‘당시선(唐詩選)’의 모두를 장식한 ‘술회(述懷)’라는 시의 마지막 일절인데 작자는 바로 위징이다.

자신을 충신으로 만들지 말아달라는 말로 왕에게 선정을 요구한 위징같은 사람은 오늘날 누구인가. 또 양신은 누구이고, 충신은 누구인가. 살펴보아도 얼른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행한 일이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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