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선을 노린 공화당의 닉슨 진영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 선거사무실에 침입,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다.
워트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이 불상사는 결국 닉슨의 사임을 가져왔으나 닉슨이 시키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일은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이같은 의혹 폭로로 닉슨은 비로소 몇몇 실무진의 아랫 사람이 획책한 사실을 알게 됐으나 보도 내용을 전면부인 한 것이 화근이었다. 의회의 탄핵 사유는 닉슨이 도청을 시켰다는 것이 아니고 알고도 부인한 거짖말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약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로 자체 조사를 벌여 사실을 시인하고 응분의 조치를 즉각 취했더라면 닉슨이 사임하는 지경으로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이처럼 거짖말 하는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용납하지 않는 고도의 품격을 요구한다.
영국 수상 처칠은 1·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세계적인 정치가며, 1953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정치적인 흠은 있다. 1900년 보수당의 하원 의원으로 당선, 정계에 몸담은지 4년만에 보수당의 보호관세 정책에 반대하여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겼다. 1906년 자유당 내각에 입각, 상상(商相) 식민상(植民相) 해상(海相) 군수상(軍需相) 육상(陸相) 공상(空相) 등을 지내다가 1924년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자유당의 분열과 대소(對蘇)정책의 이견으로 보수당에 재입당한 후 재상(財相) 등을 거쳐 수상을 세차례나 역임했지만 정치 역정에 탈당 복당의 흠결은 지울 수가 없었다.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피해 야당 당수로 있으면서 소련을 ‘철의
장막’이라고 한 유명한 말을 처음 썼다. 1951년 다시 집권했다가 1955년 수상 자리를 이든에게 넘겼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용호상박을 이루는 이인제와 노무현, 노무현과 이인제를 보면서 처칠과 닉슨, 닉슨과 처칠이 생각난다. 정치인에겐 변절이나 거짖말이나 다 지탄의 대상이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게 없다. 그러나 그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것이 더 옳은가를 생각해 본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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