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 치료제가 살빼는 약?

의료나 투약은 사람의 건강이나 생명유지에 직접 관련된 일로 고도의 전문성과 봉사정신을 요한다. 따라서 환자들은 의료기관이나 약국 등 전문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들 지시에 이의없이 맹종하다시피 한다. 때문에 이들 의약인들이 오히려 그 전문성을 악용하여 환자를 속이고 폭리를 취하는 데 몰두했다는 사실은 전체 국민들의 격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경기경찰청이 최근 다이어트 의약품 유통에 대해 수사를 벌인 결과 일부 병원과 약국에서 마약류로 분류된 향정신성 의약품을 살빼는 약으로 둔갑시켜 처방·조제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 마약류에 관한 법률상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지정돼 간질이나 우울증 등 정신질환 치료제로 사용되는 펜디메트라진과 디아제팜 등이 식욕억제 효과가 있는 점을 악용, 병원과 약국에서 살빼는 약으로 오·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성남의 어느 약국 약사는 산부인과 의사와 짜고 5년간 6천여명에게 펜디메트라진 등을 함유시킨 살빼는 약 18억원어치를 처방·조제판매하다 적발됐고, 이천의 어느 약국에선 아예 의사처방전조차 없이 펜디메트라진을 살빼는 약으로 속여 술집 여종업등에게 2천900만원어치를 팔았다. 이처럼 우울증 등 치료제가 살빼는 약으로 잘못 알려져 수요가 늘자 일본을 오가며 이를 불법 판매해온 일본인 보따리장수가 검거되기도 했다.

문제는 의약품 오·남용에 따른 부작용이다. 이 약을 복용한 부녀자들은 하나같이 현기증에 구토와 설사 등 고통을 호소했다. 장기복용할 경우 환각 환청 등 마약 중독 증상까지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진단을 거쳐 양질의 치료를 받는 게 병원과 약국을 찾는 환자의 소망이라면 이에 부응해서 정성을 다하는 게 의약인에게 부여된 책무라 할 수 있다. 생명을 다루는 고급 전문인으로서 그런 사명을 지닌 의사와 약사가 정신질환 치료제를 살 빼는 약으로 둔갑시켜 예사롭게 처방·조제·판매한 것은 분노를 느끼게 한다. 문제의 정신질환 치료제가 전문의약품인데다 마약류로 분류됐으므로 오·남용하면 ‘독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문지식으로 알 수 있는 그들로서는 직업정신을 망각한 책임이 크다. 의약인들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다룬다는 직업적 긍지와 사명감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도의 윤리적 노력이 필요하다. 보건당국도 의약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주의환기와 함께 엄중한 감시로 의약품의 오·남용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