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淸河
소설가 박영준(朴榮 ·1911∼1976)선생의 작품 가운데 ‘모범경작생(模範耕作生)’이 있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이다.
동네 전체에서 소학교를 혼자 졸업한 주인공 길서(吉徐)는 면사무소 출입이나 마을의 일을 도맡아 하는 관제 농촌지도자이다. 동네 유일의 자작농이기도 한 그는 제법 근면하고 착실하여 동네사람들의 신망도 있고, 모범경작생으로 서울 농사강습회에 뽑혀 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됨이 영악하고 이기주의적이다. 혹심한 가뭄으로 살길이 막연해진 농민들이 길서에게 도지(소작료) 인하 교섭을 간청하지만 그는 이를 외면하고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떠나 버린다. 게다가 호세( )까지 올라 더욱 고통을 받던 농민들은 호세인상공작에 길서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개하여 길서의 논에 박힌 ‘모범경작생’의 말뚝을 뽑아 쪼개버린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를 본 길서는 충격을 받는다.밤에 찾아간 애인 의숙마저 등을 돌리고 울고, 마침 성난 청년 성두가 들이닥치자 길서는 바나나를 든 채 뒷문으로 도망친다.
식민지 당국은 농촌 빈곤의 악순환이 불경기 때문이라고 둘러 대는가 하면, 극심한 흉년으로 앞이 캄캄한 농민들을 구휼하기는 커녕 호세와 묘목가격 인상으로 더욱 쥐어짠다. 농촌지도자라는 길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소학교 돈을 무이자로 쓰고 자기가 기른 묘목값을 올려 준다는 유혹에 눈이 어두워 당국의 농가 호세 인상에 협력한다.
소설 ‘모범경작생’에서는 길서의 배신행위가 이야기의 기본축을 형성하고 있지만 작가의 의도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하여 농촌의 참상과 가난의 고통을 생생하게 제시하는데 역점을 둔 것이다. 나아가 비인간적인 수탈을 계속하는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는데 초점을 맞춰 인간주의적인 작가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2000년대 오늘날도 농민들 대다수는 소설 ‘모범경작생’에 등장하는 농민들과 별다르지 않은 고통을 겪는다.쌀은 남아 돌고 집집마다 TV는 있어도 일년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마늘 파동’과 같은 별별 꼴을 모두 당하고 농사 지어 봐야 빚만 늘어 부채비율이 85%나 된다. 길서와 같은 이중인격자가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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