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록 장군

淸河

국민방위군은 1950년말 ‘국민방위군설치법’에 의하여 만 17세에서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으로 조직됐던 군대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악화되어가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부는 1950년 12월17일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명의 장정들을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 수용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 군대는 대한청년단의 단원들을 간부급으로 뽑아 갑자기 현역계급으로 임관했기 때문에

지휘 통솔이 미숙하였다. 1951년초 이른바 ‘1·4후퇴’를 당하여 서울과 각지의 방위군은 부산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도보로 후퇴하였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로 이불을 삼는 참상속에서 아사자·동사자·병자가 1천여명이나 발생하였다.

1951년 1월15일 부산에서 열린 피란국회는 첫날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추궁했다. 정부는 2월17일 36세 이상의 장정들을 귀향시켰으며, 이어 국회의 결의에 따라 5월12일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국고금 횡령사실이 국회의원 엄상섭(嚴詳燮)에 의하여 폭로됐다. 6·25 그 전란 중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105일동안 유령인원을 조작하여 24억원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2천섬의 양곡을 부정 처분한 것이다. 이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헌병 총사령관은 최경록(崔慶祿)이었다. 그가 진상조사를 실시, 국민방위군 사령관, 부사령관, 보급과장, 재무실장 등 장성급 2명, 영관급 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제13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최경록 장군이 지난 2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로운 군차량 지원지시를 거절하고 거창 양민학살사건 책임자와 국민방위군사건의 책임자를 처단하는 등 대쪽같이 처신했다.1961년 휘하 2군 박정희 부사령관이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원칙을 고수하다가 예편됐다. 육군 중장으로 군복을 벗었을 때 옛 부하들이 쌀가마를 전해줘야할 정도였으며 집 한 채 밖에 없는 그의 청빈은 영국대사, 주일대사, 교통부장관 시절에도 여전했다.

최경록 장군은 군인시절에 국민방위군 사건 등 군 내부의 부정을 은폐하지 않고 더욱 엄격히 처리했다. 4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참 군인 한 사람의 생애가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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