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적 書誌학자 故이종학씨

수원시 화서동, 허름한 집안이 온통 케케묵은 고서 투성이의 책 냄새로 진동하는 서재엔 항상 심야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일찍이 가난하여 고등공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으면서 국내 서지분야의 대가를 이룬 무학의 노학자 이종학씨. 그는 40여년을 이렇게 고서와 씨름하던 끝에 최근엔 과로가 덮쳐 타계, 어제 아주대 영안실에서 3일장으로 발인하였다.

1957년 서울 신촌서 연세서림을 낸 게 계기가 되어 전인미답인 서지학의 길로 들어섰다. 각종 고서 및 사료 등 수만점을 수집·분석한 학문적 업적은 이순신장군 연구, 일제강점의 진상규명, 독도 영유권 등에 특히 독보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난중일기’의 오역 투성이, 거북선의 실체, 충무공의 수전 뿐만이 아닌 탁월한 육전대첩 발굴, 그리고 대한제국의 한·일합방조약 원인무효 규명, 독도 영유권의 역사적 입증 등은 고인이 일궈낸 국보적 업적이다. 지난해 3월엔 평양에서 ‘일제 조선강점 불법성에 대한 남북공동 자료전시회’를 갖고 사료 2천여점을 북측에 기증했다. ‘동학사료총서’‘화성성역의궤’등 10종 40여권의 자료집을 출간하고 독도박물관장, 이순신연구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일본의 도서관이나 고문서 관리자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이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이렇게 부르는 일본인 그들은 고인이 독도 영유권 입증을 위해 일본을 50여차례나 드나드는 바람에 독도 전문가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것도 아닌 서지학의 고독한 길을 말없이 개척한 노학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역사를 김매기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사운(史芸)이란 아호를 가졌다. 평생을 잘못된 역사 바로 잡는데 실증적 문헌으로 탐구해온 선생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독도 앞바다에 재를 뿌려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전한다.

주인 잃은 서재에는 이제 심야의 불이 꺼지고 가득가득히 채워진 고서며 고문헌은 알아보는 이 없어 주인의 옛 손길을 그리워하는 듯 하다. 일흔다섯이면 아직도 더 학문을 할 수 있는 나이에 그를 잃은 것은 너무 큰 손실이다. 미망인과 외동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선생의 명복을 삼가 빌면서, 수원과 경기도의 자랑스런 노학자를 보내는 우리 지역사회가 과연 제대로 정성를 다 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

/임양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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