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여중생 사태의 추이를 접하면서 유학시절에 있었던 매우 대조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지하철 안에서 5명의 독일 남녀 청소년들이 3명의 외국인 청년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급기야 멱살잡이가 벌어졌고, 사태가 험악해지는 상황으로 전개 될 것 처럼 보였다. 그 때 여자친구로 보이는 한 소녀가 소요의 당사자인 독일 청년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신랄하게 질책을 했고, 곧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이러한 의외의 상황으로 사태가 진정됐다. 그리고는 그 소녀는 당사자를 껴안고는 계속 설득을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룹의 나머지 청년들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었다.
이는 초창기 나의 독일 생활에 있어서 매우 의외의 경험이었고, 또한 그 독일 청소년들이 엘리트 집단과는 거리가 먼 껄렁한 차림새였다는 점에서 더욱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이러한 소녀의 행동을 두고 이러한 행위는 친구집단에 있어서 한 소속원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혹 친구관계는 끝이나고, 또는 단체의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집단의 결속력은 금이 가는 것이 아닐까 ? 그러나 나는 저들의 결속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좀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냉엄한 결속력을 느낀다. 맹목적적인 집단주의는 기실 유명무실한 것이다. 실제로 집단에 위기가 닥치면 지리멸멸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집단주의는 구성원 자신들로 하여금 인간 본성에 제재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결속력은 집단피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중생 사건에 있어서 미국의 군사재판은 자신의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주 일사불란한 결속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결속력은 장차 미국에 있어서 커다란 힘으로 작용할 것인가? 또 이러한 미국의 힘은 국제사회에서 강자로서의 정당성을 인정 받을 것인가 ? 구성원의 잘못을 맹목적적으로 감쌀 때 그 구성원들은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고 결국 미국사회의 결속력은 병들어 갈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병사가 한국 소녀를 치었다의 구도가 아니라 부주의한 집단이 어린 소녀들을 치었다의 구도인 것이다. 이 문제에 정당성 이외의 어떠한 집단적 이기주의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미국 군부의 정당성이 결여된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비난을 반미의 구도로 몰고가는 세력은 이러한 정당한 지적이야 말로 미국을 위하는 진정한 친미라는 것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서봉석 (경기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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