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연결과 개성공업지구 지정 등 남북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반세기 동안 굳게 닫혔던 개성의 ‘빗장’이 풀리고 있다.
북한은 최근 ‘개성공업지구 정령’에서 개성공업지구 안의 현 개성 시가지를 관광구역으로 명시하고 ‘개성공업지구법’에서 “공업지구의 남쪽 및 해외동포, 외국인은 개성시의 명승지, 천연기념물 등을 관광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따라 정부 및 북한 전문 관계자들은 빠르면 개성공단 개발이 본격화되는 올 3월 이전에 경의선을 이용, 옛 왕궁터 만월대∼선죽교∼성균관∼고려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송악산, 박연폭포를 연계한 당일 개성관광이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북한은 개성 육로관광사업이 발표된 이후 개성시 용흥동(옛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영통사(靈通寺)를 비롯,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전에 거주했던 목청전(穆淸殿), 자남산 기슭 포은 정몽주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 등 최근까지 개성 시내 유적지 정비 작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중세 한국불교의 꽃을 피웠던 1천년 수도의 역사를 간직한 개성(開城)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개성은 화성·강화·광주 유수부와 함께 기전문화(幾甸文化)의 한 축을 형성했던 곳이다. 화성이 경기남부지역에서 문화 전성기를 이뤘다면 개성은 경기북부의 화성에 해당한다. 수원에 화성이 있다면 개성에는 개성성이 있으며, 수원상인과 개성상인이 활발하게 교류한 상업도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다른 기전문화권이 조선시대 후기 산업사회의 혜택을 받았다면 개성은 고려문화의 부흥지이자 조선초기 고려의 귀족세력을 관리하고 북방 민족의 사신을 대접하던 관문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문화면에서도 개성은 개성성곽, 만월대, 관음사, 흥국사, 선죽교 등 찬란한 고려 문화예술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개성은 분단이란 역사적인 현실 앞에서 정치는 물론 문화의 단절과 분열이라는 시대적인 아픔이 공존하고 있다.
윤한택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은 “개성을 비롯한 남북 경기도의 문화·관광교류는 50여년 분단의 세월을 통해 형성된 이질감을 해소하고 상호 이해와 융합을 통해 동질성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 멀게만 다가왔던 개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지금의 개성은 직할시급으로 개성시, 개풍군, 판문군, 장풍군 등 1시 3군으로 구성된 광역 행정구역이다.
개성직할시의 중심도시인 개성시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개주’라 불렀다. 광종 때 이르러 ‘황도’라 바꿔 불렀으며, 성종 연간에는 다시 ‘개성부’로 고쳐 불렀다.
15세기에 이르러 개성은 상업도시로 발전했는데 개성상인은 인삼, 도기, 의류 등으로 이름을 떨쳐 조선왕조 물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개성상인은 1만명으로 추정되며 전국에 분산돼 행상을 하다가 추석이나 연말에 귀가 했는데 송방은 정보교환과 상품 보급 및 보관소로 이용됐다.
이에앞서 고려시대는 국제무역항구인 벽란도를 통해 해외상인과 교류하면서 아라비아 등 다양한 인종이 드나드는 활발한 도시로서 ‘코리아’란 이름을 세계에 떨칠 만큼 국제도시로서 제 몫을 다했다.
폐쇄적이었던 조선의 한양과는 달리 고려시대 개성은 열린 사회였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세계 각지의 문물을 수용했다. ‘쌍화점’, ‘만전춘’ 등 고려가요는 자유로운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중국사신으로 개성을 방문한 서긍은 고려 견문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제도와 풍속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진취적이며 활동적인 고려문화를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바뀌면서 고려문화는 ‘외설’로 치부돼 당시의 전반적인 문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기 시작한 개성은 470년 고려의 왕도로 정한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궁터, 개성성곽, 왕릉, 불교 및 유교유적 등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분단 현실에서 북한관련 자료, 특히 문화재에 관한 정보가 빈약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발간한 몇몇 책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선 왕릉을 살펴보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릉은 송악산 서쪽 기슭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당초 현릉으로 불린 왕건릉은 외칸짜리 돌칸 흙무덤 무덤칸 벽면에는 참대, 소나무, 매화, 성좌(星座)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능 주위에는 후삼국 통일에 공헌한 8명 신하의 문무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또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공민왕릉은 건축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했는데 고려말기 웅장한 건출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왕릉이다. 이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의 수학·천문학·건축술·조형예술이 집대성돼 한국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개성성은 고려의 수도성으로 후삼국의 하나인 태봉국이 896년부터 송악산 기슭에 처음 축조했으며, 거란족의 침입 후 1011년부터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나성을 쌓았고, 1393년에는 나성안을 가로지르는 내성을 쌓았다. 이때 내성에는 남대문을 비롯해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7개의 문이 있었는데 현재 문루가 남아 있는 것은 남대문뿐이다.
고려의 왕궁터 만월대의 승평문에는 구정이라 불리는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격구경기를 진행하거나 팔관회, 연등회 등을 거행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또 북쪽 언덕은 아름다운 화원과 정자가 세워졌으며, 태평정이라는 정자의 지붕은 고려청자 기와로 장식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는 찬란한 불교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왕조는 안녕과 왕실 원찰로서의 기능을 지닌 사찰이 주조를 이룬다.
고려왕궁 만월대 동남쪽의 흥국사 터에 있던 흥국사탑과 삼국시대 석탑 형식이 많이 담긴 불일사 5층 석탑, 비신 좌우에 용이 한마리씩 조각돼 있고 비신의 앞면에 공민왕릉의 내력을 적은 광통보제선사비 및 현화사비, 현화사 7층석탑, 1370년경 화장사 부도가 있다.
이밖에 고려에 대한 충절이 서린 개성에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개성유학의 중심지 숭양서원이 남아 있으며, 이방원에게 피살된 정몽주의 충절이 서린 선죽교가 있다.
고려문화예술의 정수를 간직한 개성과의 다각적인 교류는 반쪽의 경기도를 되찾아 단절된 기전문화를 재조명하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선결과제다.
방랑시인 김병연은 그 옛날 “읍이름은 개성(읍호개성·邑號開城)인데 왜 문을 닫느냐(하폐성·何閉城)”고 했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에 있지만 경기도 개성의 문이 활짝 다시 열릴 ‘그날’을 기대해 본다.
/고영규 기자ygk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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