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승려시인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은 나라를 가리키고, 이항복의 고시조 단충가에 나오는 ‘구중궁궐 님 계신 곳…’은 임금을 가르킨다. 그런가 하면 황진이의 고시조 심야가에서 ‘어룬님 오시는 날…’은 서경덕을 사모하는 이성의 님을 가르킨다. 또 아무개님 또는 선생님처럼 고유명사나 보통명사에 붙여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인다. ‘님’은 이처럼 다양하게 쓰이지만 공통되는것은 상대에 대한 존칭이라는 점이다.
각하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 입학식에서다. 사회자가 “총장 각하께 경례!”라고 해서 내심 무척 놀랐다. 지방이었지만 명색이 국립대학 총장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이나 ‘각하’라고 해야지 무슨 말인가싶어 알아봤더니 장관은 말할 것 없고 도지사도 각하라고 하는 게 그 무렵의 통칭이었다.
군에 입대해서도 각하는 여전히 많았다. 별 하나를 비롯한 장군은 무조건 다 각하였다. ‘사단장 각하’‘군단장 각하’하며 각하 투성이였다. 심지어 연대장이나 무슨 단장 등 지휘관급 대령에 대해선 ‘부각하’라는 기발한 호칭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부각하는 1호차 지프 범퍼에 준장 별판을 달고는 덮개로 씌우고 다녔다. 이를테면 자칭 예비장군 행세를 했다.
자유당정권 때 이처럼 사태났던 각하 호칭바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공화당정권 들어서다. 각하 호칭의 거품이 빠지면서 국무총리 이상으로 한정했던 게 나중에는 대통령만 각하로 부르게 됐다. ‘대통령 각하’는 YS정권 때도 더러 그렇게 불렀다. 청와대에서 ‘각하’란 호칭을 완전히 추방한 것은 DJ정권이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 냄새가 짙은 ‘각하’란 말을 대통령 스스로가 거부했다. 며칠전 청와대에서 가진 김대중 대통령 부부와 노무현 당선자 부부의 저녁 만찬 회동에서 노 당선자는 김 대통령을 가리켜 말한 가운데 “대통령님께서…”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각하’란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위해 자기들의 조어를 갖다 퍼뜨린 단어다. 이에 비해 ‘님’은 존경의 의미가 폭넓은 우리 고유의 순수한 존칭이다. 상대가 누구든 ‘님’이란 호칭처럼 더 좋은 말은 없다.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이 보편화된 사실이 새삼 대견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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