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란 말이 많이 쓰인다. 외세를 배격하는 뉴앙스가 무척 매력적이다. 그러나 여기엔 민족저해의 함정이 있다. 일제 저항의 3·1독립만세운동은 당시 풍미한 국제사회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힘 입었다. 조선조말 대원군의 쇄국정책 역시 민족주의였다. 우리는 지금 그 중 어떤 민족자주를 말하고 또 듣는 가를 돌아봐야 할 시기다. 이에 관련한 남남갈등의 예로 친미와 반미를 들수가 있다. 결론은 친미든 반미든 다 보수의 관념이다. 사대주의로 치닫는 친미가 민족저해의 보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적 반미 역시 민족저해의 보수적 쇄국이다.
반미만이 가장 의식이 깨어난 진보주의로 행세하는 민족자주의 지향이 얼마나 모순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개념의 혼돈을 겪고 있다. 민족주의의 실체는 무엇이고 보수와 진보가 지닌 한계의 개념은 무엇인가를 확연히 구분 짓지 못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성토하는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측은 핵 문제의 경우 북미관계이므로 남측은 빠지거나 아니면 미국에 공동대응하는 민족공조를 하자고 다그친다.
그러나 우리는 북의 정권이 인민들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해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거듭 호소하는 그같은 민족주의가 참다운 민족주의라고 믿지 않는다. 인민들 거주 이전의 자유를 차단해야 하고 해외문화 유입을 제한해야 하는 체제유지를 위한 통제사회의 불가피성이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앞서 우리는 예컨대 북의 정치범 수용소 등 저들 인권의 본질적 말살에는 관대하면서 남측의 지엽적 인권유린에는 마치 말세가 다가온 것처럼 기를 쓰는 이녁 일부의 편향된 시각을 경계치 않을 수 없다.
촛불시위가 지닌 민족 자긍심은 비단 촛불을 든자의 것만은 아니다. 촛불을 안든 사람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더 이상 촛불을 들고 계속 흥분을 토해내야만이 민족주의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민족주의자로 치는 구닥다리 관념이야말로 참다운 민족주의에 반한다. 참다운 민족주의는 맹목적 민족사관이 아니고 민주적 사관에 토대를 둔 민족주의어야 하는데 있다. 폐쇄사회 지향이 민족주의로 행세하는 것은 정권 세습이 신성시 되는 통제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주의 원리를 삶의 가치로 표방하는 개방사회에서의 민족주의는 열린 국제사회에서 민족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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