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문화재연구원이 화성시 태안읍 기안리 및 향남면 발안리에서 발굴, 공개한 백제의 제철공방터와 대규모 취락 유적은 획기적인 사료로 평가된다. 화성 일대가 백제 왕국의 등장과 비밀을 풀어줄 보고(寶庫)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안리의 제철관 유적 중 화로유적 10기, 도랑유적 12기, 숯가마 1기, 제련 때 사용된 송풍관과 철 찌꺼기 등은 이 지역이 한성 백제 당시 중앙에 인접한 주요 지방세력의 거점으로 보여 관심을 끈다. 대규모 제철공장이 형성된 것은 주변에 그만한 수요와 노동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발안의 취락지 유적은 초기 백제시대 주변부의 발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건물바닥을 파고 들어간 수혈식(竪穴式) 평면 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출입구가 튀어나온 철(凸)자형과 사각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55채의 주거지가 확인된 것은 이례적이다.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옹관묘 3기, 풍남동식무문토기와 타날문단경호, 대형독 등 수백개의 토기만으로도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초기에 이르는 편년(編年)체계를 세울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화성은 10년전만 해도 백제유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43번 국도를 따라 주거-생산-토성-매장공간 유적 등 백제유적지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주목을 받아 왔다. 발안 취락유적의 경우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토층별로 나오지 않고 교란된 상태에서 출토돼 형성과 지속시기를 놓고 아전인수식 해석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취락이 400∼500년 동안 유지됐다면 주거지가 중복돼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기안 유적은 경기 지역에서 발견된 첫 제철 관련 유적이고, 발안 유적은 미사리를 제외하고 가장 큰 백제 취락 유적지라는 점에서 백제 연구에 가속도를 붙여 준다. 앞으로 제철유적이 존재한 시기와 장소가 함유된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면 초기 백제를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성 기안·발안 유적은 형성 시기인 3·4세기 때의 고분만 확인되면 백제사 연구에 큰 획이 그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만으로도 이번 유적지 발굴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의 계속적인 노고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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