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일제는 1939년 11월30일 한민족의 ‘황민화(皇民化)’를 촉진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2월1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응한 가구는 6개월동안 7%에 불과했다. 다급해진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에 갖가지 불이익을 줘 그후 한달동안 79.3%로 끌어 올렸다. 창씨를 하지 않는 호주는 노무징용에 우선 끌려 갔고 그 자녀는 학교 입학을 못하게 했다.

식량배급도 하지 않았으며 취업까지 막았다. 행정 민원서류도 뗄 수 없었고 우편 배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는 1942년 1월29일 평소동주(平沼東柱)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그가 다니던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에 냈다. 그는 졸업반이었고 일본 유학을 준비했다. 창씨개명의 수치를 감수하고 유학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본의 아니게 창씨개명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 컸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우에 / 내 이름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다. 이 시엔 그의 창씨개명에 따른 수치감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되찾을 날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다. 이 시를 지은 시기는 1941년 11월24일, 일제가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때였다. 윤동주는 이름을 빼앗긴 삶을 벌레의 삶으로 비유했다. 결국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은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윤동주 자신의 우리말 이름이었다. 지난 5월31일 도쿄(東京)대 강연에서 일본 자민당 정조회장 아소 다로가 “일제 때 창씨개명은 당시 조선인들이 성씨를 원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이름은 존재의 상징이다. 이름의 상실은 곧 동물의 삶을 뜻한다. 아소 다로의 망언을 듣고 윤동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일관계는 이렇게 아직도 ‘가깝고도 먼 나라’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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