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馮道)

“입은 화를 불러 들이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로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安身處處宇)” 전당시(全唐詩)에 풍도(馮道)가 지었다고 전하는 시(詩)다.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에 다섯 왕조에서 8개 성씨의 군주 11명을 모셨다는 풍도가 난세를 살아가면서 보여준 처세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풍도는 ‘황소(黃巢)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882년 중국 허베이에서 태어났다. 20대 후반에 유주절도사 유수광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관리를 시작했다. 당의 변경인 유주는 유달리 하극상 등에 의해 절도사가 쉼없이 바뀌는 지역이었다. 그가 처음 모신 유수광도 역시 이전의 주군을 몰아내고 절도사에 오른 아버지 유인공을 강제로 밀어내고 절도사가 된 인물이었다.

풍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좌절은 대연(大燕)을 세우고 황제에 오른 유수광의 정벌에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옥에 갇히면서 찾아왔다. 군벌의 쿠데타가 생활화된 유주에서의 하급관리 경험은 그의 입을 평생 다물게 했다. 그는 환관 장승업의 추천으로 진왕 이존욱의 휘하에 관리로 재등용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47세인 929년 후당(後唐)의 재상이 된 이래 23년간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권력의 정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당 명종의 사위 석경당이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晉)을 건국했을 때도 풍도는 여전히 재상이었다. 65세인 947년엔 아예 거란의 신하가 됐다.

풍도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희대의 간신이자 변절자라고 낙인찍혔다. 절묘한 줄타기의 달인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 수록 평가가 바뀌었다. 왕조 교체 때 마다 백성들의 대참사가 적었던 것은 그의 ‘처세’덕이라고 했다. 풍도가 관계에서 물러난 뒤 자서전에서 자신을 “나라의 은혜를 받으면서 가법을 따랐고”라거나 “나라에 충성을”이라고 자평했다. 섬긴 대상에 군주라는 말은 없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건 국무총리는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누구를 모셨느냐 보다 무엇을 위해 일했느냐에 달려 있다. 고건 총리도 이제 전면에 나서야 할 때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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