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갈등

196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길거리 간판 가운데서 보고 이해가 안됐던 업종을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물었다. “임자! 헬스클럽이란 게 뭐 하는 데가?” “아! 그것 말입니까. 쉽게 말씀 드려서 뱃대지에 낀 기름을 빼는 곳입니다!” “뭐야?!” 박 대통령은 당장 없애도록 지시해 한동안 헬스클럽이 간판을 내리는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북측은 천리마운동으로 우리보다 잘 살았고, 우리는 춘궁기란 것을 몰아 냈을까 말까하던 때여서 배에 낀 기름을 돈 주고 빼는 족속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호사스럽게 들렸던 것이다.

또 대부분의 국민들이 실제로 잘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어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배에 기름이 끼도록 잘 먹일까 하는 생각으로 골몰하던 차에 들은 헬스클럽은 마치 이방지대 같은 거부감을 주었던 것 같다고 이 비화는 전한다.

그래서 환경문제는 환경따위 쯤으로 제쳐두고 고도성장을 지향하였고, 달러만 되면 지금의 중국처럼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내다 팔았던 수출 지상주의로 나갔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이젠 생산보다 환경이 우선시 되고 노동집약형 물품은 되레 수입하여 쓰는 형편이 됐다. 이만이 아니다. 식생활에도 다이어트가 보편화되어 ‘살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헬스클럽이 아니고 병원에서 수술까지 해가며 살을 제거하는 세상이다.

이런 가운데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누구랄 것 없이 각계 각층이 불평 불만으로 다투어 제목소리를 높이는 집단이기의 세태가 되었다. 불평 불만은 어느 시대고 없을 수 없다. 건전한 불평 불만은 발전의 견인차다. 그러나 공연한 불평 불만은 사회를 혼란케 한다.

밥 술이나 먹게 되어서 생기는 상대적 갈등의 불평 불만일 것 같으면, 밥 술도 제대로 못먹던 불과 수 십년전 시절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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