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거울'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 참여시인으로 손꼽히는 김수영(金洙暎·1921∼1968) 시인은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문단의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다. 이튿날 오전 9시쯤 병원에서 숨졌는데 그의 나이 47세 때 였다.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세계가 4·19를 전후해 현실 참여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 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 났었다.

황혼 무렵이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양계로 가족을 부양할 때의 일화는 문단에 널리 회자됐다.

최근 김수영의 초기 시 ‘아침의 유혹(誘惑)’이 새롭게 공개됐다. 민음사가 ‘김수영 전집’의 개정판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여동생인 김수명씨의 작업 노트에 기록된 메모를 근거로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에 게재된 ‘아침의 유혹’을 찾아냈다.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산림과 시간이 오는 것이다/서울역에는 화환이 처음 생기고/나는 추수하고 돌아오는/백부를 기다렸다/그래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무지무지한 갱부는/나에게 글을 가르쳤다/그것은 천자문이 되는지도/나는 모르고 있었다/스푼과 성냥을 들고/여관에서 나는 나왔다/물속 모래알처럼/소박한 습성은 나의 아내의/밑소리부터 시작되었다/어느 교과서에도 질투의 ○○은 무수하다/먼 시간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모래처럼 그들은 온다/U·N위원단이 매일 오는 것이다/화환이 화환이 서울역에서 날아온다/모자 쓴 청년이여 유혹이여/아침의 유혹이여”

이 시는 일부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글자도 있지만 시인의 정열과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즘의 특성이 나타난다. 광복 직후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어‘시는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거듭 실감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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