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눈물 젖은 빵조차 못 먹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얼마전 생활고에 시달리던 30대 주부가 세 자녀를 아파트 14층에서 떨어 뜨리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자살한 사건도 ‘눈물 젖은 빵’조차 못 먹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참극이다.
자살한 주부 손씨는 가구공장에 다니던 남편, 그리고 세 자녀와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단란하게 살았다. 불행은 3년전 가구공장이 부도나면서 시작됐다. 남편은 특별한 직업 없이 일용 노동자로 일했고 손씨도 식당 주방에서 시간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하지만 다섯 식구가 살기엔 항상 쪼달려 손씨는 은행에서 1천만원을 빌렸고 남편 명의 카드로 3천만원을 대출했다. 신용카드 3개로 빚을 돌려 막다 손씨 부부는 모두 신용불량자로 분류돼 빚 독촉에 시달렸다. 돈벌이를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은 몇 달전부터 대전의 한 공사장에서 간신히 일을 하기 시작했고 손씨는 세자녀와 함께 15평의 연립주택에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 나갔다.
손씨가 집에서 7km쯤 떨어진 다른 마을의 20층짜리 아파트 14층까지 올라가 일곱 살, 다섯 살 난 두 아이를 먼저 밀어 떨어 뜨리고 세 살 난 막내를 껴안고 투신, 삶을 마감한 날 집에 찾아온 친구에게 “살기가 힘들다, 내가 죽으면 애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씨가 죽은 뒤 세상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였다. 가정의 행복은 반드시 돈이 있다고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도깨비들도 웃을 일이다. 돈이 없는데 식량을 살 수 있는가. 돈 없는데 병원에 갈 수 있는가. 돈 없는데 버스 탈 수 있는가. 초등학교 1학년 큰 딸은 그날 수영장으로 현장학습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참가비 3천8백원을 내지 못해 죽었다. 돈 없으면 세상은 이렇게 냉혹하다.
사람들은 자살할만큼 독한 마음으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고 말한다. 남의 일 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안되는 게 더 많은 세상일이다.
굶주려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서러움을 모른다. 돈에 쫓겨보지 않은 사람은 빚진 사람의 고통을 모른다. 꾼돈을 제 때 못 갚는 비애를 알 리 없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신용카드 빚, 은행대출 연체 독촉 전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을 자살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다.
손씨는 아픈 자식들을 병원에 데려 가기 위해 이웃이나 친지에게 1만~2만원을 자주 꾸어 썼다고 한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아이들을 업고 친정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갔다고 한다. 그 참담함을 이 세상은 잘 모르고 가난을 무능으로, 게으름으로 몰아 붙이는 오만한 자들이 도처에서 혀를 놀린다.
그러나 손씨는 실수를 했다. 엄마도 없는 각박한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 두느니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 하였겠지만 이는 살인행위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자식들을 부모 없는 고아로 만들지 않으려는 모정이었지만 너무 참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엄마, 살려 줘! 안 죽을래. 죽기 싫어”
아이들이 엄마에게 아파트 밖 14층 아래로 떼밀리기에 앞서 울며 매달렸다니 이 얼마나 환장할 노릇인가.
자식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절대로 없다는 그런 얘기는 하지 않겠다. 비록 자식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손씨는 불행한 시대의 가련한 희생자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병원비 1, 2만원 꾸지 않아도 되는 가정의 주부가 되시라. 어린 세 영혼과 엄마의 명복을 삼가빈다.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