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쓰는 유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 공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을 군사 기술자로 꼭 취직시켜 달라고 썼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오르기 몇시간 전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는 최후의 심경을 담은 ‘유서’이다. 칼 융은 1912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은 노예근성을 가진 제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적었다.

콜럼버스가 항해자금을 담당한 관리에게 보낸 편지는 “향료와 광산, 나체로 생활하는 주민”들에 대해 말하면서 새로운 땅을 발견한 흥분을 표출했다. 갈릴레이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달의 경이로운 모습을 호들갑스럽게 전했다.

“4개월 사이에 대량의 우라늄으로 핵의 연쇄반응을 일으켜 에너지와 라듐과 유사한 원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유력해져 왔습니다. (중략) 현재의 정세를 생각하면 정부는 우리나라에서 핵반응 연구를 하고 있는 물리학자 그룹과 접촉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1939년 8월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핵무기 연구에 착수할 것을 진언했던 이 편지에는 놀랍게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반핵(反核) 평화운동에 만년을 바친 것으로 알려진 이 위대한 과학자는 사실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를 부추겼던 것일까? 훗날 아인슈타인은 “내 생애에서 커다란 잘못은 그 편지에 서명한 것이었다”고 술회하며 “하지만 그것은 나치가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편지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편지를 쓴 사람들의 당초 의도를 뛰어 넘어 숨겨져 있던 사고방식과 감정, 애정과 실망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심이 담겨 있다. ‘유서’ 또한 편지다. 살아 있을 때 미리 쓰는 유서는 가장 절실한 편지다. 받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사실은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다.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 8.9월호가 황금찬 시인 등 문인들이 미리 쓴 유언장을 특집으로 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유서 미리 쓰기’가 유행할 것 같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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