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의 극치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55호)은 처음에는 이궁(離宮)으로 창건됐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정궁(正宮) 경복궁이 소실된 후 복구될때까지 300여년간 역대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봄으로써 본궁 구실을 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관대궐’ 또는 ‘동궐’이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 제3대왕 태종이 즉위하여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조성을 명하여 1405년(태종5)에 완성됐다. 이때 도성에는 이미 종묘(宗廟)·사직(社稷)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조성돼 있어 이 궁은 하나의 별궁(別宮)을 도성내에 두기 위하여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제9대 성종이 즉위하고부터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는 일이 많아졌고 특히 연산군은 재위중 주로 이 궁에서 정사를 봤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때 큰 화재를 당했으나 1647년(인조25)에 옛 모습으로 복구됐으며 효종·현종·영조가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지 2년 뒤인 1912년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창덕궁인정전(仁政殿)과 후원(後苑)을 일반에게 관람하도록 하여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을 실추시켰다. 광복 후에도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며 1980년 그동안 훼손되었던 궁내시설을 정비, 관람을 제한하여 옛 궁궐의 면모를 지켜 오고 있다. 이 창덕궁을 한·일병합에 앞장선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1858 ~ 1926)이 3·1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과 이듬해에 잇따라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에게 일본 왕실에 헌납해 이를 별궁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는 문건이 얼마전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 (일본이 경성에) 새로운 별궁을 만든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 또한 오래 걸리는 일임을 지적하면서 당시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을 아버지 고종이 살던 덕수궁으로 옮기는 대신 창덕궁을 (일본왕족의)별궁으로 개조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완용의 이런 요청에 대해 사이토 총독이 오히려 “(조선인들의) 반발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거절했다니 아무리 고인이지만 일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입증하려던 이완용의 ‘친일 매국행위’가 생각할수록 가증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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