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벽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을 조직,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한청년당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 돼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을 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사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출생지 경기도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인민당을 결성, 당수직에 앉았다. 몽양은 1946년 10월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 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기관설치 반대’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월 사회노동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였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세의 청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아 절명했다.

몽양에 대한 소개를 보면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에 독립운동가·언론인으로, 민족대백과사전엔 독립운동가·정치가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정작 국가보훈처에선 몽양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도좌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몽양의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아예 심사를 안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1995년 이동휘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적이 있지만 광복 이후까지 사회주의 색채를 유지한 경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독립운동 여부가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준이 돼야 할텐데, 분단된 현실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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