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님의 초상화’를 감히…

북쪽 사람들은 으레 그런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들의 사는 방식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본 그 장면은 마치 코미디 같았다. 대구 U대회에서 북측 선수단이 두번이나 문제삼은 것은 그래도 꼬투리는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의 현수막 파동은 실로 황당하다. 현수막은 예천지역 농민회에서 내 건 것이다. 내용은 북측 선수단을 환영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북에 대한 애정과 친밀감을 포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같은 자구보단 무엄하게 다룬 ‘장군님’의 길거리 초상화에 대한 불경죄가 더 큰 관심사였다. 6·15 공동선언을 한 남북의 정상이 서로 악수를 나누는 장면, 그것을 길에 내걸면 찬양으로 보는 남쪽 시각과는 달리 불경으로 보는 그들의 시각차는 참으로 민족의 불행이다.

경기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우정 세워 앞다투듯이 뛰어가 현수막을 내리는 북측 여대생 응원단의 분노는 가히 절규였다. “장군님의 초상화 얼굴을 감히 구겨지게…” “장군님의 초상화를 어떻게 비오는 길 거리에…”, 그러면서 오열하듯 눈물을 쏟기도 했다. 똑같은 말을 쓰고 혈맥의 피도 같은 핏줄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는 방식이 이토록 다른가. 다름을 모르진 않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것이 엄존하는 남북의 체제 차이다. 아직도 ‘김일성 수령’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유훈통치를 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충성이 곧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인식된 저들의 체제에서나 있을 법한 기막힌 현상이다. 대를 이어 충성을 다짐하는 저들의 정치적 공동선은 이미 정치학의 연구 대상이 된 지 오래이긴 하지만 참으로 절묘한 감이 없지않다.

물론 여대생 응원단은 북의 체제에서 선택된 계층이긴 하다. 그래도 그렇지,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저런 천신만고를 해가며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 입국 러시에 비하면 알다가도 알 수 없는 것이 저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남북의 체제 차이는 합쳐질 수 없는 이질의 장벽이 이처럼 높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다’란 말처럼 말인즉슨 더 좋은 건 없지만 서로의 체제를 고집하는 한 그것은 허구다. 북의 여대생 응원단과 마찬가지로 ‘장군님’의 길거리 초상화 앞에서 울부짖는 통일을 바란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아직은 요원하다. 그같은 감상보단 평화 공존이 민족의 이익이다.

북측 응원단의 행위를 비방하기 위해 이를 거론한 것은 아니다. 체제의 차이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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