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왕세자 교육의 특이점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딸은 어머니가,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친다’는 유교이념에 따라 부왕(父王)이 교과목을 정하는 일부터 교사진 선정, 수업시간 조정에까지 개입했다. 때로 신하들과 학부모인 부왕이 교육방식을 두고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
핵심 교과목은 유교경전과 역사지만 평소 생활을 통한 덕성교육, 예체능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효(孝)였다. 왕세자는 아침 저녁 국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視膳)’과 부모의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侍湯)’을 해야 했다. 군 통수권자로서 활쏘기, 말타기, 사냥 등에도 일정 정도 이상을 연마했다.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장래 왕이 익혀야할 중요 덕목이었다. 왕세자가 편식하거나 비만해지면 이를 관리하지 못한 내시들이 문책 당했다. 특히 아침을 거르면 학습 진도가 떨어진다 해서 내시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조선조 왕세자교육 코스의 단연 우등생은 제22대 정조(正祖)였다. 정조는 돌 지나면서부터 붓과 먹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원손(元孫·훗날의 정조)이 네 살 되던 해 영조(英祖)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 원손을 불러 앉히고는 글을 읽고 글자를 써보이게 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을 막힘 없이 외운 원손이 ‘부모’ 두 글자까지 크게 써보이자 영조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시려고…”라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원손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던 여섯살 무렵 영조는 원손의 스승 남유용을 불러 호피 한벌을 내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금 경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원손을 위해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엄한 스승이 돼라’는 뜻이다. 경을 포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다.”
수원의 ‘화성(華城)’을 축성한 정조는 184권짜리 개인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썼다. 정조의 제왕적·학문적 성취 뒤에는 손주를 위해 손수 ‘어제조훈(御製祖訓)’이라는 교재까지 만들며 뒷바라지 했던 할아버지 영조가 있었다. 본받을만한 손주 사랑이다. ‘홍재’는 정조대왕의 아호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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