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감사할줄 아는 삶

프랑스의 화가 밀레(1814~1875)가 1859년 완성한 ‘만종(晩鐘·55.5×66cm·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은 ‘사랑과 노동과 신앙을 그린 인생의 성화(聖畵)’다. “가난한 부부가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간다. 하루 종일 땀흘려 일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종소리를 들은 부부는 두 손을 모아 감사 드린다”는 이야기를 ‘만종’은 들려준다. 기자가 학생시절 장래의 희망을 화가로 꿈 꾸게 했던 명화이기도 하다.

밀레는 ‘만종’을 통해 사랑과 노동과 신(神)에 대한 감사(신앙)를 말했다. 부부가 함께 건강해서 일할 수 있는 힘과 농토가 있음은 만족한 삶이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은 행복의 원천이다. 그러니까 神의 은총이 무한히 감사한 것이다.

감사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마음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1861~1941)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보았다. 성경에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이 있다.

남에게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중증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로 우뚝 선 스웨덴 출신의 레나 마리아가 지난 2월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했다. 그는 공연 자리에서 “팔은 없지만 대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며 자신의 목소리에 감사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엘리너 호지먼포터(1863~1920)의 동화 ‘소녀 폴리에나’가 있다. 집안이 가난한 폴리에나는 평소 선물로 예쁜 인형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동네 교회에서 준 위문 상자엔 인형 대신 목발이 들어 있었다. 폴리에나는 자신이 목발이 필요없는 튼튼한 다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2001년 1월26일 일본 도쿄의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살신성인(殺身成仁)한 한국 유학생 이수현씨를 추모하는 일본 국민의 열기는 지금까지 식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인 이수현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빌 게이츠 등 세계의 저명한 최고경영자(CEO)들의 특징은 현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산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낮추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노랫말처럼 꽃보다 아름답고 신록처럼 싱그러워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거나 아예 잊어 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난 7월25일 경부선 서울 영등포역에서 철도 역무원 김행균씨가 위험지역에서 놀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두 발을 잃은 사고가 일어났다. 철도청은 사고가 난 뒤 열차 승객으로 보이는 어린이와 보호자를 찾았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철도원’ 이야기가 국민적 관심속에 TV, 신문 등 방송과 언론에 오르내렸으니 그 어린이의 부모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대신 죽은 의인들도 많지만 생명을 건진 아이와 부모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감사를 모르는 무심한 사람들이다.

감사할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첫째가라면 아마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이 무슨 동네북이냐고 발끈 하겠지만 극히 ‘소수’만 빼고는 자기들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뽑아준 국민들의 은혜를 도무지 모른다. 만일 화를 내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소수’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뒷간 갈 때 사정 다르고 다녀올 때 사정 다르다고 하지만 해도 너무들 한다. 이념도 목적도 없이 개인의 잇속을 챙기려고 이 당, 저 당 정치판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가장 쓸모 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너무 크고 폐허가 황량하지만, 재해 복구에 나선 사람들의 일손과 답지하는 온정이 한없이 감사하다.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사람처럼 오늘 ‘감사 기도’를 드린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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