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커스단 ‘동춘’은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박동춘씨(1970년 작고)가 1925년 창단했다. 30여명으로 출발한 초기 ‘동춘’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서커스 뿐만 아니라 신파극, 춤, 만담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명성을 날렸다. 1950~1960년대엔 단원 250명 규모의 거대 공연단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등이 당시‘동춘’의 멤버들이었다.
1962년도에 텔레비전이 생기고 극장 쇼와 영화 등이 발달하면서 ‘동춘’은 쇠락해졌다. 이 과정에서 초대 단장이 별세하고 잠시 그의 아들이 2대 단장을 맡았다가 1975년부터 현 박세환 3대 단장이 ‘동춘’을 이끌고 있지만 관객은 갈수록 줄고 마스코트 코끼리가 혹한을 못 이겨 숨을 거두었는가 하면, 태풍으로 무대와 장비가 몽땅 떠내려가기도 했다.
천막무대이긴 하지만 다행히 지난 3월 부천시 중동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했고 더욱이 오는 2005년 4월엔 부천시의 도움으로 현 공연장 자리에 1천800석 규모의 전용공연장이 완공될 예정이다. 이 곳엔 단원들의 숙소는 물론 인재 양성을 위한 서커스아카데미도 들어선다. 상설공연장과 아카데미가 완공되면 떠돌이 생활은 일단 끝이다.
‘동춘’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월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보고 나서다. 오랜 전통만을 믿고 별 다른 기술 개발없이 고정 레퍼토리에 집착하던 ‘동춘’에 평양교예단의 공연은 그야말로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서커스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게 사회적 무관심 탓으로 돌렸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박세환 단장은 바로 중국으로 가서 대륙 곳곳을 헤매며 150여개 중국 잡기단(서커스단)과 접촉하며 그들의 기술을 탐색했고 국내에 초청, 합동공연을 수차례 가졌다. ‘동춘’ 단원들은 여기에서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커닝하듯 익혀왔고 박 단장은 공연·연습 장면을 ‘X파일’에 구축했다. 어릿광대와 구슬픈 색소폰 소리, 진한 화장과 애처로운 표정의 소녀 곡예사 줄타기 등으로 삶에 지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서커스의 부활’을 ‘동춘’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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