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의 보검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의 백제성이 있던 지역이 지난 6월 양쯔(揚子)강 싼샤(三峽)댐으로 담수되기 전 제갈량 보검찾기가 있었다. 제갈량이 임종 전에 “내 병서와 보검을 양쯔강 절벽에 숨겨라”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리를 잘 아는 이 지역 주민들을 동원, 양쯔강 절벽을 뒤졌으나 미확인된 여러 잡동사니 유물만 나왔을 뿐 제갈량 보검은 끝내 찾지못한 채 전설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제갈량은 1천700년 전의 인물이다.

제갈량 보검 찾기에 실패한 중국이 이번에는 이보다 8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2천500년 전 월나라 왕 구천(句踐)의 보검을 발견했다며 난징(南京)에서 일반에 공개했다. 대만의 어느 수집가가 소장해온 것을 찾아 전시했다는 이 보검이 어떤 방법으로 진짜 구천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는 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양 날로 된 검의 조형미와 찬란한 무늬며 광택이 현대 주조 기술자들도 감탄할 만큼 청동합금 기술의 완벽품으로 명성에 걸맞게 여전히 날카로움을 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명검의 주인이 복수의 절치부심으로 유명했던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주인인 점 또한 흥미롭다. 구천이 자만하다가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굴욕의 회계산 항복 끝에 나라를 빼앗긴 게 BC 494년의 일이다. 이에 구천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충신 범려의 보필을 받으며 등을 찌르는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봐가면서 해이해지기 쉬운 심신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마침내 부차를 죽이고 나라를 회복한 것은 망한 지 장장 21년만이므로 BC 473년이 된다. 범려는 나라를 되찾고 나서는 “이젠 할 일이 없다”면서 만류하는 왕의 곁을 굳이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춘추전국시대의 와신상담 고사에 얽힌 보검이 지금도 전해져 있다는 것은 실로 신비스럽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와신상담의 의지없이 너무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또 주군(主君)이 잘되면 범려처럼 곁을 떠나 부담을 덜어줄 생각은 않고 자리를 얻어 누를 끼치는 사람들이 많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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