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왜 그리도 많은지, 신문에 나오는 ‘시인’ 직함이 참으로 많다. 시인이 많은 게 나쁠 건 없다. 다만 시인은 많아도 좋은 시는 드문 게 시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무척 안타깝다.
손가락으로 쓰는 글이 있고, 머리로 쓰는 글이 있고, 가슴으로 쓰는 글이 있다. 시는 가슴보다 더한 온 몸으로 써야 한다. 아니 온 몸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몸에 농축된 시상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터질듯 분출되어 정리되는 글이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겨우 손가락 재주로 가슴도 아닌 잔머리를 굴려 재주만을 피우는 시들이 많다.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그같은 낙서 수준의 시라면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 지 있다.
‘얇은 紗 하이얀 꼬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네라/파르란이 깎은 머리/薄紗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시 ‘승무’(僧舞)의 몇구절이다.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선생과 함께 크게 활약한 청록파 시인이다.
‘승무’는 한국 고전문학의 백미다. 역시 지금 읽어도 고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진한 동경과 연민의 정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와 닿는다. 조지훈 선생의 부인 김난희 여사(81)가 선생의 유고 유품 260여점을 생전에 후학을 가르쳤던 고려대에 기증, 고대 역사관에 전시될 것이라고 한다. 1933년에 발표된 ‘승무’의 육필원고가 실린 보도사진이 특히 눈길을 끈다.
시 작품은 시 정신의 난산이다. 순산된 시엔 그러므로 시인의 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고전이든 현대 시든, 장르가 어떻든 간에 난산의 생산성 가치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시는 기교보단 진실이 담겨야 한다. 요즘의 시인들은 너무 기교에 치우는 것 같다. 시 정신은 결핍하면서 발표욕이 앞서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얼굴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시인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많아도 시인이 무척 부럽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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