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김달진문학제

김달진문학제전위원회와 사단법인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주최·주관한 ‘제3회 전국 시인 시낭송 페스티벌’에 참석했었다.

노향림 박정대 박주택 손종호 신달자 신덕룡 유자효 윤석산 문인수 원은희 이서린 이은봉 이응인 임병호 최재섭 하영 허영자 시인의 주옥 같은 시 낭송이 있은 진해시민회관 대강당은 시인들의 지순한 감성과 독자들의 공감, 그리고 만추의 서정이 어울려 장내를 그윽하게 감돌았다. 특히 故 김달진 선생의 작품 두 편을 공군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생도 대표가 낭송하는 모습은 한결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불빛 아래 비치는 흐릿한 모습 / 八十세의 내 늙은 시력을 안타까와 하다가 / 돋보기 쓰고 가까이 다가서니 / 처음 보는 그 얼굴의 주름살이여. // 중도 아닌 것이, 속인도 아닌 것이 / 그래도 삼십여 년 불경을 뒤적였네 / 부처 보기, 사람 보기 부끄러워라 / 중도 아닌 내가, 속인도 아닌 내가. // 기나긴 어둔 이 밤 언제 샐런가 / 다시 얻기 어려운 덧없는 이 몸을 / 천 만 시름 속에 몸부림치네. / 어둠을 깨치는 / 새벽 종소리는 언제나 들릴런가.”

-‘某月某日’ 전문.

“오늘도 저 인수봉에는 / 흐린 구름 나직이 떠돌겠구나. / 오랜 병 앓아 누워 / 창 밖의 찬 빗소리 혼자 듣나니… // 나는 언제부터 나그네 되었는가. / 사방, 사유, 상하 / 십방 어디를 바라보아도 / 내 고향은 보이지 않네. / 우리 집은 보이지 않네. // 자식 노릇도 제대로 못한 나를 / 지아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나를 /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나를 / 아, 천하 사람들아 나를 벌하라.”

-‘천하 사람들아’ 전문.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1907 ~ 1989) 선생은 1907년 경남 창원군(현 진해시) 웅덕면 소사리에서 태어 났다. 1929년 ‘문예공론’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1936년에는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시인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0년에 출간한 시집 ‘청시(靑枾)’ 와 ‘올빼미의 노래’ 등 많은 시집을 통하여 무위자연 내지 동양정신의 빼어난 서정을 일궈 한국시 발전에 기여했으며 고도한 정신주의와 불교문학적 작품은 후학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는 ‘한국선시’ ‘한국장자’ ‘법구경’ ‘한국한시’ 등을 번역, 저술한 월하의 생애에서 기인된다.

월하의 문학얼은 그의 고향 진해에서 그대로 계승된다는 점에서 뜻이 더욱 깊다. 월하의 문학적 세계를 매개로 지역문화의 뿌리를 찾고, 지역민들과 숨결을 같이 하는 향토문학의 진수를 보여 준다. 젊은 문인들의 용기를 끌어내어 창작 분위기를 따뜻하게 조성하고 더불어 문학 연구활동의 활성화를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년 개최하는 김달진문학제는 월하전국백일장, 문학심포지엄, 전국 시인 시낭송 페스티발, 청소년 시낭송대회, 문학비평 관련 도서전, 문인 육필 전시회 등을 비롯, 훌륭한 시인과 문학평론가에게 김달진문학상을 시상하는데 해군회관에서 있을 올해 제14회 수상자 2인에게 1천만원에 달하는 상금과 부상이 각각 수여됐다.

전국 문인들이 부러워하는 일 중 하나는 김달진문학상의 상금 및 행사비용을 인구 14만명의 진해시가 모두 부담한다는 사실이다. 내년부터 상금을 대폭 증액하겠다는 김병로 진해시장의 약속은 또 다시 박수를 받았다. 특히 2004년 9월 완공을 목표로 국비 10억원, 시비 19억3천200백만원 총 29억3천200만원을 들여 진해시 소사동 48 부지에 생가와 전시관을 복원, 건립하고 있는 현장에서 문학을 존중하는 진해시민들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보았다. 마음 속 깊이 박수를 보냈다.

생가 복원 현장을 보고 돌아 오면서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어서 부처 보기, 사람보기 부끄럽다”고 고뇌하면서 “자식 노릇도, 지아비 노릇도,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나를 아, 천하 사람들아 나를 벌하라”는 월하 선생의 육성을 들었다.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일상을 돌아보며 뉘우쳤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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