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함양에 항우보다 먼저 입성, 진시황에 이은 2세 황제 자영의 항복을 받은 것은 유방이었다. 휘황찬란한 아방궁,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 미색의 궁녀들로 보이는 것마다 눈이 휘둥그래 졌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협객노릇을 하다가 겨우 정장(면장) 벼슬에 있었던 그로서는 궁에 머물며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용장 번쾌가 간했으나 듣지않자 군사 장량이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함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면서 거듭 주청하여 성밖 패상에서 야영하며 항우가 오기를 기다렸다.
유방은 뒤에 해하의 일전에서 항우를 궤멸시켜 천하통일을 이루고 한 고조에 올랐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항우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였던 것이다. 뒤늦게 함양에 당도한 항우는 유방이 야영을 하며 자신을 기다린 것을 알고는 유방을 더 의심하지 않은 게 뒤에 패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방궁이 별천지처럼 보이기는 항우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는 닥치는대로 노략질 하고는 불을 질렀다. 한서(漢書) 등 중국 역사는 무려 석달동안이나 불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시황이 궁궐로 지은 아방궁은 불탄 것이 아니라는 외신이 전해져 주목을 끈다.
그토록 오래 탔다면 불탄 흙이나 목탄이 발견돼야 하는 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방궁의 규모를 동서 1천270m, 남북 426m로 확인한 중국 고고학자들은 불탄 것은 아방궁 부속 건물인 함양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조사단은 지난 1년동안 많은 인원을 동원한 탐사 시굴끝에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서는 고조에서 왕망까지 전한(前漢)의 229년간 역사를 반표, 반고, 반소 등이 120권의 책으로 저술한 것이다. 한고조의 라이벌이던 항우를 악랄하게 묘사하기 위해 아방궁을 불태웠다고 기록했을 지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다’란 말이 생각난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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